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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현타'는 없다.(사도행전 17:10-15)

by TwoTalents 2022. 10. 9.

제목 : '현타'는 없다.

 

본문 : 사도행전 17:10~15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말씀 :

바울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 자신들을 도우라는 환상을 보게 된다.

바울과 전도팀은 이 환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마게도냐 지역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마게도냐 지역에서의 전도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곳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곳곳에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바울과 전도팀이 착각한 것인가?

어쩌면 이런 생각으로 흔들리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기에.

받은 소명이 확실하기 때문에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는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연단 하셨고, 동시에 사역지를 옮기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이런 주님의 인도하심에 바울과 전도팀은 순종하며 마게도냐 지역 전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마게도냐 지역에서의 마지막 여정이 그려지고 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몸을 피했던 바울과 전도팀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데살로니가를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본문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어두운 밤을 틈타 유대인들의 눈을 피해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완전히 탈출시켰다.

곳곳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바울 일행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돕는 형제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과 전도팀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핍박을 받아도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 바울과 실라가 이동한 곳은 베뢰아라는 도시였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약 65~8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이다.

바로 전에 데살로니가에서 붙잡힐 위기에 맞이했었던 바울과 전도팀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역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전도팀은 베뢰아에서도 여느 때처럼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다.

전략적으로 그곳에서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였다.

본문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본문의 더 너그러워서를 개역 한글 버전에서는 더 신자적이어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원문에서 헬라어로 유게네스테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이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상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외에도 관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등의 의미를 뜻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개역 개정에서는 더 너그러워서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깐 베뢰아 사람들이 진리 앞에서 편견 없는 객관적 자세,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으로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날마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였던 것이다.

 

베뢰아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이다.

우리는 고정관념에 깨고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열린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를 스스로 상고하면서 다시 성경과 비교하며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에 대해 ?’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비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그대로 받으라고 주장한다.

헛소리다.

반드시 ?’라고 질문해야 하고, 비판하는 자세로 설교를 통해 나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여야 한다.

비난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는 비판을 통해 사람의 말이 걷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성경과의 비교, 대조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베뢰아 사람들의 이런 모습, 그러니깐 진리를 향한 열린 마음, 말씀을 향한 간절한 마음, 성경을 깊이 상고하는 자세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했다.

본문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유대인과 이방인 중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처럼 헬라 귀부인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따랐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귀족 남자들 중에서도 회심자가 생겼다.

이렇게 베뢰아 사람들의 너그러운 심성은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더라도 바울과 전도팀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바울과 전도팀의 사역은 별 탈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에 데살로니가에서부터 대적자들이 바울을 쫓아왔던 것이다.

본문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마침 베뢰아를 지나가다가 바울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바울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베뢰아까지 온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는 짧게는 65km, 길게는 80km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 그 거리를 바울 한사람 잡겠다고 일부러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울을 향한 질투심 때문이다.

질투심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동은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바울을 보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스스로의 삶을 갉아먹는 것이 된다.

베뢰아까지 바울을 쫓아 왔을 때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잠시 멈추든가 아예 그만두었을 것 아닌가?

그렇지 않더라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악을 행하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잘못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너그럽지 못하고, 간절함이 없고, 무엇보다 성경을 스스로 상고하고 묵상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잘못된 확신은 결국 잘못된 열심을 품고,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이들이 너무나 많다.

기본적인 믿음의 상식만 있다면 판단할 수 있는 일들인데도.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잘못된 확신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는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고, 도덕적으로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런데도 잘못된 세습을 인정하고, 목회자의 불법과 거짓말을 옹호하며, 세상 사람들의 비판을 대적자들에게 받는 고난이라 주장하더니, 자신들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교회는 블로그가 있다.

기껏해야 하루 방문자 수가 100~200회 수준이다.

이것은 대외적으로 본다면 있으나, 없으나하는 블로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블로그가 몇 년 사이 명예훼손 신고를 6~7회 정도 받았다.

한번은 이단인 신천지였다.

나머지는 S 교회의 오 아무개 목사 측과 M 교회의 김 아무개 목사 측이었다.

블로그에 게시글로 설교를 올리면서 두 교회를 언급하며 교회 세습과 불법 행위에 관한 비판적인 얘기를 했었는데.

그것을 명예훼손이라며 게시물을 신고한 것이다.

블로그 운영자 측에서는 명예훼손이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고자가 신고했기 때문에 일단은 게시물을 블라인드 처리를 한다고 통보를 했다.

제가 블라인드를 풀고 싶으면 풀 수는 있는데, 그럴 경우 원래 신고자가 법적 대응을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함께 있었다.

 

이것은 추측인데.

아마도 S 교회와 M 교회에서는 사이버 대응팀을 따로 운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매주 검색을 통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글이나 영상에 대해 신고하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한번 신고했던 블로그나 채널에 대해서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감시를 계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색으로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개인 블로그의 글을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것이 잘못된 확신, 잘못된 열심으로 판단력이 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베뢰아까지 찾아온 유대인들도 그랬다.

이들은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대로 동네 깡패들을 동원해서 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의 판단을 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인인 자신들이 정작 하나님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평화로웠던 베뢰아에서까지 대적들로 인해 소동이 일어났고 바울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울을 돕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다.

본문 14, 15.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베뢰아에서 회심한 형제들이 바울이 위험하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은 다르다.

데살로니가에서보다는 덜 위험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만 피하였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목표가 바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가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 일행에게 큰 반감이 없었기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무리해서 다른 사람들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 일행을 집안에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야손을 붙잡았었다.

하지만 베뢰아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바울이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자신만 도망한 것이 아니라.

베뢰아교회를 좀 더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이 목표 삼고 있는 자신만 몸을 피하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남겨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대적들의 위협으로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을 벗어나 다시 새로운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곳은 아가야 지역의 아덴이었다.

아덴은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덴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니깐 아덴을 다음 선교지로 계획하고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적들의 위험을 피해 바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떠날 수 있었던 배의 목적지가 아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바울과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함께했던 형제들은 빨리 출발하는 배에 올랐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아덴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역자는 흔들릴 수 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했음에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땅으로 전전긍긍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폈듯이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확실한 소명 앞에서 굳건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해하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획에도 없었던 아덴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였다.

그러기 위해 베뢰아로 돌아가는 사람들 편으로 전도팀에게 빨리 아덴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마게도냐 지역을 넘어 아가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말씀 마무리.

신조어 중에 현타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로 열정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하며 행동하다가 급 현실을 깨닫는 상황을 의미한다.

조금 전까지 계속됐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며 힘이 쭉 빠지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는 현자 타임이라는 다른 의미가 있는데, 지금은 앞의 뜻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명했던 현실 자각 타임’, 현타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현타를 경험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이야말로 현타를 경험했어도 수없이 경험했을 사람처럼 보인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바울의 현실은 언제나 고난이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쫓겨나고, 도망가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 내버려지듯이 가야 했다.

물론 주를 거부했었고, 성도들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를 감안해서 스스로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반복적이고, 계속된.

끊임없는 공격과 모함 앞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가 완벽하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최선을 다해 이겨내려 했고, 결국 이겨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어려운 현실 자각에서 오는 허무함, 즉 현타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바울은 현실에 머물지 않았다.

바울은 앞으로를 생각했고, 미래를 바라보았다.

베뢰아에서 도망쳐 나와야만 했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새롭게 도착한 아덴에서 있을 앞으로의 사역을 생각하였다.

유대인들 때문에 피해야 했던 베뢰아의 현실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새로운 곳 아덴에서의 미래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고난을 본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현실만을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품기 힘들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의 소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언젠가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에서는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이 있기에.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답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 소망이 눈앞에 보이는 암울한 현실에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자각 타임이 아니다.

믿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 소망 타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 곧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 붙잡고, 이 말씀으로 천국의 소망을 품으며.

오늘도 현실을 넘어 미래를 향해 기쁨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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