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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질투는 악의 힘.(사도행전 17:1-9)

by TwoTalents 2022. 10. 8.

제목 : 질투는 악의 힘.

 

본문 : 사도행전 17:1~9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말씀 :

오늘은 질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한글로 번역된 질투라는 단어가 없다.

그런데 5절에 기록된 시기가 헬라어 젤로오라는 단어로 질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같은 뜻으로 보고 나눌 것이다.

 

2003년에 개봉한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시인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가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여기서 패러디한 것이다.

영화와 시의 원래 내용과는 상관없이 사람들 중에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말하며 질투를 자신이 성장하는 에너지원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질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절제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한 질투, 지나치다 못해 넘쳐버린 질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꾸며지지 않은 질투의 본질을 살피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인이자 작가인 마이크 프렐은 질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가 단순히 성공한 사람을 향한 부러움이 아니라, 그를 향한 악의와 증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성공한 사람을 망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노력하여 이룬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분노하며 악의를 품는다는 것이다.

마이크 프렐은 이런 질투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질투, 그러니깐 악의와 증오가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실행으로 옮겨진다면 그것이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이크 프렐의 말대로라면 누구라도 질투 때문에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이런 질투로 인해 일어난 사건, 사고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말씀 중에 소개하려고 자료를 찾았는데.

너무 잔인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 많아서 차마 설교 시간에 나눌 수가 없었다.

궁금하시면 각자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성경에서도 질투 때문에 벌어진 범죄를 많이 읽을 수 있다.

사도행전 7장에서도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사도행전 79, 10.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아버지가 편애하는 동생을 질투한 나머지, 형들이 그 동생을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기가 찬 범죄가 저질러졌던 것이다.

질투 때문에 눈이 뒤집혀서 가족이고 뭐고 판단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시기하여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기하여와 같은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질투가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행을 저지르게 한다.

 

바울과 그 일행은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잘 마무리하였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열매가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 선교지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본문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나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치게 된다.

이곳에서는 선교팀이 전도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따로 없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무조건 바울이 전도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쨌든 그 두 곳을 거쳐 당시 경제의 중심지인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마게도냐 지역의 수도였다.

그러면서 무역의 중심지로 국제도시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 많은 민족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여러 민족에게 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방 종교, 이방 문화와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빌립보와는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존재했었다.

바울은 여느 때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의 회당을 가장 먼저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

본문 2, 3.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자신의 전도 전략대로 성경, 즉 구약에 익숙한 자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언제나 성경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죽으시고,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듣고 깨달아야 할 기쁜 소식인 것이다.
성경을 벗어난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면서 성경은 그저 타이틀일 뿐임을 보게 된다.

본문으로 삼은 성경과 실제 설교 내용은 별 상관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감동적인 예화나 성공한 사람의 일화 등을 설교의 중심 내용으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동하여 교회에 헌신하게 하고, 성공하며 복 받을 수 있으니 열심히 헌금하라고 전한다.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오늘날 너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빛과 소금은 고사하고 교회가 사회의 악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본문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에게 더 큰 호응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적지 않은 귀부인, 즉 상류층 부인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들인데다가,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으로 성경을 더 잘 알 것인데, ? 이들이 복음 받아들이는 것을 이방인들보다 더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 성경을 잘 안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선택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것이 주가 된다.

잘났으니깐 선택받은 것이고, 선택받았으니 잘난 것이다.

자기들이 최고인 것이다.

또한 이런 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하였다.

하나님을 말씀을 자기들에게 맞게 임의로 해석했고, 변질시켰던 것이다.

나중에는 그 변질된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어버렸다.

자의적 해석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이 되는 코미디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구축한 종교적 테두리 밖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지금도 핍박하는 것이다.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교만으로 눈이 멀고, 귀가 닫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울을 향한 질투 때문이었다.

본문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앞의 두 이유는 어쩌면 그리 큰 이유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바울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질투였다.

이 질투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모함하고 가짜로 만들어 버렸던 주된 이유이다.

앞서 말 한대로 본문의 시기라는 표현이 질투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리냐? 아니냐는 유대인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문제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데살로니가에서 상류층과 귀부인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이 변함없이 행사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적잖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어쩌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이미 바울의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가 가는 도시마다 자신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기존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좀 더 강력한 방법으로 바울과 그 일행을 공격하려고 한다.

저잣거리의 깡패들까지 동원해서 떼를 지어 온 성안에 소동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는 바울과 실라가 머물고 있다고 들은 야손의 집으로 그들을 붙잡으려고 쳐들어갔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 없었다.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 6, 7.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상세한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회심한 형제들을 통해 바울과 실라는 미리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전달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도자들은 빌립보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위험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피신하였기에 야손의 집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깐 동원된 깡패들은 바울과 실라 대신, 그들을 집에 들였던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을 붙잡았던 것이다.

사역자들에게 주어졌던 핍박이 이제 믿음의 형제, 자매에게도 가해지는 순간이다.

 

어쨌든 사람을 강제로 잡았으니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깡패들은 당사자도 아닌 사람을 붙잡았다.

그러니깐 그 어떤 심각한 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바울과 실라는 고소당할 만한 잘못이 없었다.

바울의 가르침 때문에 고소를 한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 관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 자기들끼리의 종교 문제일 뿐이다.

종교적 세력 다툼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유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그러한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면 된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를 집에 들인 야손과 형제들에게는 더더욱 고소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거짓말을 하며 바울과 실라를 모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느닷없이 아무 상관도 없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다.

바울이 가이사가 아닌 예수라는 다른 왕을 세워 로마에 대적한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깐 읍장이라고 불리는 데살로니가의 행정 장관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까지 거론된 고소를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문 8, 9.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가이사를 향한 반역이 일어났다는 소리에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유대인들이 무리하게 고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립보 때와는 다르게 본문에서 붙잡힌 야손과 형제들은 데살로니가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빌립보 때처럼 재판이 부당하게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가이사의 이름이 거론되었기에 재판은 진행되었고,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었다.

아마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것이고, 그에 상응한 재정을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질투로 인하여 괴물이 되어버렸다.

질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질투가 눈과 귀를 막았고, 질투로 인해 죄 없는 사람에게 악의를 품게 되었다.

질투로 깡패를 동원하는 악행도 서슴지 않았고, 질투는 거짓말하고, 모함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하였다.

질투가 분별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질투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앞서서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나누었다.

그렇다면 질투는 나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질투가 나의 힘이 되어도 되는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바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일 수 없으며, 나의 힘이 되어서도 안 된다.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에서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나 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하며, 모델 삼아 정당하게 노력한다면 이것은 질투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동경이며, 선망이다.

 

질투는 마이크 프렐의 말처럼 악의와 악행을 동원한다.

부족한 나를 정당하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나은 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끄집어 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질투는 누구에게라도 정당한 힘이 될 수 없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결코 품어서는 안 되는 마음이다.

믿는 자들이 품어야 할 사랑과는 반대 지점에 있는 못된 감정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질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질투를 음란, 도둑질, 심지어 살인이나 간음과도 같은 선상으로 말씀하셨다.

질투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더럽혀지고, 살인자나 간음한 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질투는 나의 힘이 될 수 없다.

질투가 나의 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질투는 나를 더럽게 하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게 할 뿐이다.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동경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망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동경만이 나의 힘이고, 천국을 향한 선망이 나의 능력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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