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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기뻐하라. 고난 더할수록...(사도행전 16:19-34)

by TwoTalents 2022. 9. 24.

제목 : 기뻐하라, 고난 더할수록...

 

본문 : 사도행전 16:19~34

19.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말씀 : 

지난주에 우리는 맞는 말로 칭찬을 하는 것 같지만, 방해적 요소가 되어버리는.

진리를 말하지만, 실상 진리를 전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살펴보았다.

빌립보에 살고 있었던, 점치는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한 여인의 이야기다.

바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여인의 외침으로 괴로워했었다.

그래서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던 점치는 귀신을 그녀에게서 내쫓아 버렸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은 속박에서 자유를 얻는 놀라운 역사인 것이다.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오히려 고난을 겪게 된다.

바울을 통해서 여인에게 일어난 이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무리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고발을 당하게 되고, 붙잡혀 매를 맞았으며, 그 후에는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역사에 통로가 된 직후, 곧바로 주어진 핍박인 것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나눌 것이다.

 

바울을 통한 이적, 즉 여인에게서 귀신이 떠나간 것을 싫어했던 이들은 바로 귀신 들린 여인의 주인이라는 작자들이었다.

본문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귀신 들린 여인에게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이 귀신 들린 여인이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는 것으로 인해 이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주인들이 더 이상 이러한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바울 때문에 돈벌이의 수단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게 된다.

나중에 관리들 앞에서 떠들어댔던 것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 풍속 이런 것 때문이 아니다.

비록 자신들의 종이지만 귀신에게서 해방된 여인의 입장 같은 것,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훼손한 것에 대해 분노할 뿐이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관리들에게 끌고 간 것이다.

 

, 여인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은 다음 무엇을 하겠는가?

자신들의 사업을 망친 바울과 실라를 벌주기 위해서 거짓말하고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실제로 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재판장에 끌려갈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돈벌이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그냥 붙잡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누명을 씌워서라도 자신들은 정당하게 만들고, 바울과 실라를 괴롭게 하려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본문 20, 21.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이들은 처음부터 바울과 실라에게 일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도 길거리 아무 데서나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도처를 찾았고,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서로에게 대척점이 될만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점치는 귀신이 들렸던 그 여인 때문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앞서 말 한대로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은 것만으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할 수는 없다.

그러니깐 다른 것을 문제 삼는다.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들이 마치 로마 사람인 자신들에게 좋지 못한 풍속을 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다.

당시에 빌립보에는 반유대적인 정서가 있었다.

바로 1년 전에 황제 클라우디오가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축출하라는 칙령을 내렸었다.

로마의 식민지역인 빌립보에서도 이 칙령을 따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치 유해한 무언가를 가르치고 전달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바울과 실라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사실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깐 너도나도 일어나서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게 된다.

본문 22~24.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많은 사람들이 고발하고 일어나니깐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상관들은 그들의 원함을 들어주게 된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도 그랬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빌라도가 변호할 기회라도 주었지만.

바울과 실라에게는 변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그들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차꼬를 채워 옥에 가두어 버린다.

바울과 실라는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선한 일을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악인들에게 누명을 쓰게 되고, 능욕당하고, 매를 맞고, 묶여서, 갇히게 되고 만 것이다.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일을 겪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그 일로 곤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라는 속담이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자주 일어난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욕심이라는 것이 타인의 선의마저도 악으로 갚을 정도로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바울과 실라는 선의를 베풀고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긴 채 두들겨 맞은 다음에 말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은가?

저는 아직까지 너무나도 부족해서, 억울함과 답답함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것 같다.

화도 나고, 누명을 씌운 작자들이 밉기도 할 것이고.

그러다가 혹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울과 실라는 주님께 소명을 받았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주께서 전하라고 하신 복음 전하였고, 그러던 중에 귀신에게 붙잡혀 복음을 방해하는 안타까운 영혼을 도와준 것이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임한 것이 고난이었고, 속박이었다.

여러분이라면 어두운 감옥에 갇힌 채로 무엇을 했을 것 같은가?

 

바울과 실라는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송하였다.

본문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부당함과 억울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변함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이다.

참으로 희한하고 신기한 상황이다.

모든 이들이 기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먼저 잡혀있었던 다른 죄수들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주목하여 들었던 것이다.

본문의 듣더라는 헬라어로 에페크로온토라는 말로 집중해서 듣는 것을 의미한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감옥에 갇혀있다.

그곳은 절망과 좌절뿐인 곳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죄수들이 그들의 소리를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이렇게 기도하며 찬송하는 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그 여파로 감옥의 문들이 다 열린 것이다.

거기다가 죄수들을 결박했던 것들이 모두 벗겨지게 되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바울과 실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라면, 바울과 실라가 그렇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키셔서 옥문을 열어 주시고, 자신들의 차꼬가 풀어지게 해달라고 바울과 실라가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황상 바울과 실라는 그러한 기도를 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 그들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출하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는 무관하게 주를 위해 고통받게 됨을 감사하며 찬송한 것이다.

억울한 상황, 누명을 쓰면서 당하는 핍박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음을 기뻐했던 것이다.

고난이 더할수록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천국의 소망을 주신 주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렇다면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바울과 실라를 통한 복음 전파의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대적들이 아무리 방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옥을 지키고 있었던 간수, 그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본문 27, 28.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지진 때문에 잠자고 있던 간수도 깨어나 버렸다.

그런데 옥문이 모두 열려있는 상태였다.

간수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죄수들은 모두 도망갔을 것이고,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죄수가 탈출하게 되면, 그 죄수를 지키고 있었던 간수가 대신해서 죄수의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시의 로마법이었다.

간수의 생각에는 옥문이 열리고 감옥에 있던 죄수가 모두 도망가버렸으니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간수는 자결하는 것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남을 가족에게나마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두운 감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죄수들이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으니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실제로 이때, 도망간 죄수가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한 명이라도 도망갔다면 그 죄수가 받아야 할 죄를 간수가 대신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죄수들이 아닌, 옥문을 지키고 있었던 간수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진으로 인해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결박이 풀어진 것이 기막힌 기적이지만.

그런 중에도 한 명의 죄수도 탈출하지 않은 것 역시 놀라운 기적이다.

이 부분은 분명히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다른 죄수들이 집중해서 들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더라도 간수를 위해 주께서 죄수들의 탈옥을 막으셨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일은 간수에게 그의 영혼을 흔드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간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울임을 확인한 다음, 그에게로 달려가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문 29, 30.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도망가지 않아서 고맙다느니, 이 은혜 있지 않겠다느니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바울과 실라에게로 뛰어가서 그들 앞에 엎드리고는 구원의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본문에서 일어난 일이 이 간수에게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구원을 생각하게 하는 신비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대적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고발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은 진짜 이유를 간수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귀신 들렸던 여인은 여러 날을 바울 일행을 쫓아다니며 그들을 향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 간수가 직접 보았거나, 적어도 다른 이를 통해 들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기에 기적을 체험한 후에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질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구원을 갈망하는 간수에게 바울이 이렇게 대답한다.

본문 31, 32.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갇힌 자가, 자신을 가두었던 자에게, 그러니깐 속박된 자가 속박한 자에게 구원의 길, 참된 자유의 길을 전하는 재밌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참된 구원은 육체의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내 영혼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바울은 구원을 질문하는 간수에게 복음의 핵심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 예수를 향한 믿음이 간수를 구원할 것이고, 그의 가족을 구원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본문의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와 함께 나의 가족도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신은 물론, 가족 중에 누구라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먼저 믿은 자에게 주어진, 가족 전도의 의무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기에 간수는 자신이 들은 복음을 가족에게도 들려주기 위해 바울과 실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게 된다.

본문 33, 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복음을 들은 간수는 깨달음을 얻었고, 깨달음을 얻은 즉시 믿음으로 행동하였다.

그만큼 본문의 경험은 간수에게 충격적이면서 신뢰할만한 것들이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간수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주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도 바울과 실라의 가르침을 듣게 한다.

복음은 간수의 온 가족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고, 그것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다.

 

말씀 마무리.

오늘 본문에서는 고난 속에서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의 기쁨이다.

본문에는 이들이 기뻐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감옥에서 차꼬를 찬 상태에서 주께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했다.

아무리 구속하고, 아무리 방해하여도.

고난이 더하고, 핍박이 더하여도...

바울과 실라의 기쁨을 막을 수 없었고,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고난 속에서의 이 기쁨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리고 죄수들을 변화시켰고, 간수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기쁨으로 확장되었다.

변화된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믿음으로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간수는 절망 속에서 죽음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결을 시도하려 했다.

그때 구원의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간수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생명의 음성이었다.

그는 참된 구원의 길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가족에게 전달하였다.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온 집안이 기뻐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고난과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믿는 자들이 고난받을 때.

모든 핍박자들을 물리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라.’

그것으로 천국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의 이름 때문에 욕먹고, 매 맞고, 누명을 쓰게 되면.

욕한 놈 벌주시고, 때린 놈 더 때려주시고, 모든 누명 벗겨주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욕먹고, 박해받고, 누명 쓴 그 상태에서 그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

?

주의 이름으로 감당한 그 고난으로 인해 하늘에서 주어질 상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바울과 실라는 차꼬를 차고 옥에 갇힌 자신들의 현실이 아닌, 그 현실로 인해 주어질 천국의 소망 때문에, 그리고 그 놀라운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이 생명을 낳고, 또 다른 기쁨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우리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벗겨지지 않는 누명 속에서도 천국을 소망하며 기뻐하는 우리 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가 기뻐함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기를.

새로운 기쁨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그런 기쁨의 소유자, 사람이교회 공동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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