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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주를 위한 선택.(사도행전 16:1-5)

by TwoTalents 2022. 8. 27.

 

 

제목 : 주를 위한 선택.

 

본문 : 사도행전 16:1~5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말씀 :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이 실라와 함께하는 제2차 전도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시작된 이 2차 전도 여행은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게 되고, 오늘 본문은 이곳에서의 사역을 소개한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앞으로의 사역에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자신의 영적 아들이라고까지 고백했던 디모데와의 만남이다.

디모데와의 만남에서 바울은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바울의 선택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은 이 부분을 나눌 것이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본문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바울 일행이 더베루스드라에 이르게 된다.

더베와 루스드라는 1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이 이미 방문했던 도시이다.

특히 루스드라는 1차 전도 여행의 내용 면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48절 이하에서는 1차 전도 여행 시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다.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낫게 되는, 바울을 통한 이적의 구체적인 실례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곳이 바로 이 루스드라이다.

이 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여겨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던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의 이간질로 인해 바울이 돌에 맞아 죽기 전까지 이르게 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요동치는 역동적인 사역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루스드라였다.

 

디모데는 이때, 그러니깐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역동적인 사역이 이루어졌던 1차 전도 여행 때, 자신의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회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를 제자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서, 디모데는 바울이 다녀간 이후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잘 성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디모데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인 혼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유대인의 전통이나 관습과는 동떨어진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그가 바울을 다시 보게 될 때까지 여전히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쨌든 이 디모데에 관한 사람들의 평판은 너무나도 좋았다.

본문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루스드라는 물론, 이웃인 이고니온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까지 칭찬받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전도 여행에 디모데를 합류시키려던 것에는 디모데 개인의 믿음과 함께 사람들의 좋은 평판이 한몫했을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주위 사람들의 평판은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사람이 누구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느냐는 그의 사회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평판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무작정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도 없다.

누구에게, 어떻게 평판을 받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니깐 평판의 주체가 어떤 유의 사람들인가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미치지 않고서야 안중근 의사를 단순히 살인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본에서는 그저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 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식민지의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예수님에 관한 평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반면에 이단자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로, 로마를 자극하여 유대 사회를 위협하는 선동가로 평가하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함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을 오히려 고지식하고 답답한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참과 거짓의 구분이 없이 그저 아첨과 아부를 삶의 자세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향해 사회생활 잘한다고, 윗사람을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치켜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가 사람들에게 칭찬받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신 것 등을 예로 들며.

무조건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 하며, 그것이 마치 그 사람의 절대 평가가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목회자의 말은 전혀 맞지 않는 비유일 뿐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한 것도 주위의 평판으로만 결정한 것이 아니다.

주위의 평판과 디모데 자신이 보여준 모습, 그리고 바울이 직접 본 디모데의 모습을 종합해서 이루어진 선택인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디모데를 선택하였고, 디모데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선택이다.

그런데 떠나기에 앞서 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

본문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디모데와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먼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다.

그렇기에 유대적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태어나서 8일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 전통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런데 디모데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모계 중심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역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비록 혼혈이지만 어머니가 유대인인 디모데도 유대인의 범주에 속해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디모데가 당연히 할례를 받았어야 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전도사역에 있어서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을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다.

이것은 그 지역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도팀이 방문하게 될 모든 지역의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바울은 앞으로 전도사역에 걸림이 되는 일이 없도록하기 위해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일어날 불필요한 논쟁을 사전에 예방한 것이다.

여기서 마가 요한을 거부했을 때처럼 사역에 걸림이 되고 방해가 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제하려는 바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본문에 나타난 바울은 이전에 보였던 바울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느껴진다.

바울은 할례를 꼭 받아야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유대주의자들과 반목했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 1차 종교 회의까지 참석했었다.

사도행전 151, 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물론 여기서의 요지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부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할례가 진정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똑같았다.

고린도전서 717~20.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무슨 말인가?

할례를 받든지 말든지 그것은 구원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런 바울이 아무리 전도사역의 원활함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다르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이 올바른 모습인가?

바울의 이 모습은 쉬운 길을 위해 타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오히려 전도하는 곳곳마다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가 구원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이 부분에서 지난주 설교를 잠깐 떠올려 보겠다.

지난주에는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그 다툼으로 인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되는 것에 대해 나누었다.

그들의 갈라섬은 바울이든 바나바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들의 문제는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비록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선택을 했었다.

그 두 사람 모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고, 단지 서로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나누었다.

 

이런 내용을 오늘 본문의 바울에게 다시 한번 적용할 수 있다.

바울 전도사역에 걸림이 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을 선택한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것은 전도를 위한 바울의 선택이었다.

만약 바울이 속으로는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할례를 주었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바울의 믿음은 변함없다.

하지만 여전히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그는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이 연약하여 확신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지, 할례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할례는 받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할례를 받아야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과 상관없는 할례를 받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구원과 상관없는 할례를 받아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지켜왔고, 어릴 때부터 배워온 전통을 행하는 것으로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게 놔두면 된다.

단지 그 짐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까지 강요하지 않도록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것이 바로 예루살렘 종교 회의였던 것이다.

 

바울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영화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이나 변질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그 선택으로 인해 누구의 이름이 높여지고, 누가 영광을 받는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본문 4, 5.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였지만, 여러 성으로 다니며 더 이상 할례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예루살렘 종교 회의 결정을 온전히 전하였다.

그 결과 이방교회는 할례 때문에, 율법 때문에 짓눌렸던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고, 굳건한 믿음으로 사람들에게 담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부담스러운 문제가 해결되니깐 교회로 모이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주님의 이름은 높여지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바울의 선택으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든지, 자신의 권력이 커지거나, 권위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타협하며 변질한 자들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선택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비난을 받고 있는데, 불법으로 자기 배 채우면서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사기치는 인간들.

성경까지 왜곡하면서 세습을 강행하고, 그것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인간들.

이런 삯꾼들이 자기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는 보상금으로 받은 교회 재산 아들에게 다 물려주기를 선택하면서 자기 아들을 독생자라고 부르는 마귀도 등장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독생자가 단순히 외동아들을 말하는 건가?

기독교에서 독생자는 고유명사로 봐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미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고, 자기 아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짜들에게 현혹되지 않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오늘 함께 나눈 바울의 두 가지 선택은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디모데를 선택하는 것과 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바울의 선택은 철저하게 주께서 주신 소명을 기준으로 하였다.

소명을 바르고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기도하여 선택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이루어진 선택이 디모데와 디모데의 할례인 것이다.

 

마가 요한으로 인해 한 번의 실패를 맛보았던 바울은 그 어느 때 보다 철저히 디모데를 검증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디모데가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 외에도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귀 기울였다.

가능한 모든 루트를 통해 디모데를 검증한 것이다.

그렇게 디모데를 선택한 후에는 지난 1차 전도 여행을 경험을 바탕으로 디모데의 할례를 선택한다.

지난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공격받고 방해받았다.

도시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돌아 맞아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방해자들은 온갖 것을 꼬투리 잡고, 트집 잡았다.

그렇기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이다.

그가 할례를 받음으로 가장 강하게 공격받을 수 있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게 했던 것이다.

이런 주님을 위한 선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어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바울의 본을 받아 날마다 주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꼭 사역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모든 상황, 모든 곳에서 주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를 위한 우리의 선택이 주님의 아름다우신 뜻과 하나 되어 세상이 떨며, 믿는 자들이 기뻐하고,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놀라운 역사로 이루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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