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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올바른 결론을 내리다.(사도행전 15:1-21)

by TwoTalents 2022. 8. 3.

 

제목 : 올바른 결론을 내리다.

 

본문 : 사도행전 15:1~21

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 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 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 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말씀 :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사도행전의 중심 내용은 이방 땅으로 향하는, 땅끝으로 향하는 복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전해진 복음으로 새롭게 믿음을 갖게 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결론 내리는 내용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다.

이제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며 지난 사역을 돌아보고 다음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잘 성장하면서 이방 전도의 중심교회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안디옥 교회에 위기가 닥치게 된다.

 

위기는 항상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은 언제라도 교회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번 안디옥 교회의 위기는 외부로부터의 그것이 아니었다.

믿지 않는 자들의 핍박이나 방해가 아니라는 말이다.

안디옥 교회의 위기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유대로부터 찾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들먹이며 구원이라는 민감한 부분을 가지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본문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본문의 어떤 사람들이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갈라디아서 212절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추정될 뿐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대주의자이며, 율법주의자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유대에서부터 안디옥으로 와서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흔드는 것이다.

이들은 모세의 법을 운운하며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안디옥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메시지와는 대치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졌던 사역 전체가 흔들릴 판이다.

 

유대에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왜 안디옥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 시간에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생각하고 있어야 할 부분은 이 사람들이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인해 유대주의, 율법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게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안디옥에서 이루어진 사역의 근간이 흔들릴 판이니.

이것을 바울과 바나바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본문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과 바울 및 바나바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특히 본문의 다툼은 헬라어로 스타시스라는 단어로 봉기폭동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거기다가 적지 아니한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두 사도와 유대의 어떤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 아주 격렬했었다는 것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격렬하게 다투고 토론한다고 해서 결론 내릴 수가 없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과 깨달음에 대해서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다.

유대의 어떤 사람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고정 관념으로 사도들의 말이 우습게만 들릴 것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만 느꼈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아예 공론화시켜 버린다.

교회의 본부 격인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얻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팀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게 된다.

본문 3, 4.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방인들에게 일어났던 믿음의 역사,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을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듣고 기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기뻐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맛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이 맛있다고 기뻐하며 칭찬할 때, 식탁의 냅킨이 삐뚤어져 있다고 불만을 내비치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소문하고 전혀 다르다고, 몹쓸 식당이라고 자기만의 논리로 우기는 이상한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바리새파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에게 일어난 믿음의 역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본문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본문의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은 유대에서 안디옥까지 올라가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어떤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이들에게 첫 번째가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것보다 율법이 우선이고,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한다.

앞서 안디옥으로 갔던 어떤 사람들이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잠시 언급했다.

안디옥에 올라갔던 어떤 사람들도, 예루살렘의 바리새파 중에 어떤 사람들도 이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꾸만 엉뚱한 것에, 본질이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고, 말씀을 맡은 민족이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신들에게서 그리스도가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라는 말이다.

그런 다음에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자기 논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관한 깊은 통찰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예루살렘에서도 쉽게 결론 나지는 않았다.

본문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종교 회의가 열릴 정도로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앞으로 교회 사역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칫 어설픈 결론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고, 지금까지의 노력과 열매를 헛되게 만들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분별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근거는 주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드디어 교회의 두 기둥 중 한 명인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본문 7~9.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베드로는 거의 10여 년 전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일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는 같은 성령이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유대인의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인가?

아니면 할례를 받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오직 믿음이었다.

고넬료의 믿음을 보시고 주께서 그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율법 안에 있는 유대인과 율법 밖에 있는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10, 11.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의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율법을 가장 우선시하는 유대인들이지 않은가?

그런 그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율법을 주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가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들도, 자신들의 조상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내 버린다.

실제로 너네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왜 이제 주님의 제자가 된 이방인들에게 멍에처럼 짐을 지우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것이 무슨 말인가?

율법으로 따지자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문제가 할례이지만, 이것은 꼭 할례 하나만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전체를 의미한다.

율법을 잘 지켜야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이 되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주장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조차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구원받은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이다.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이런 말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바나바와 바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다.

본문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이미 전하였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들었어도 무시했다.

자기들 주장 내세우기에 바빴다.

하지만 베드로의 발언으로 논쟁은 중단되었고, 주위는 조용해졌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에 다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보이신 표적과 기사를 전했던 것이다.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까지 끝나고 드디어 이 회의의 의장이라 할 수 있는 야고보 장로가 입을 열었다.

본문 13, 14.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야고보 장로는 먼저 시므온, 즉 베드로의 발언을 인정하며 공감을 표하였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나바와 바울 이전에 이미 베드로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야고보 장로의 지적은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이때까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의 위상과 바나바와 바울의 위상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야고보는 사람들이 더 신뢰하고 인정하는 베드로를 내세운 것이다.

 

그런 다음 성경을 인용하여 이방 사역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본문 15~18.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아모스 911, 12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야고보의 인용은 정확하게 히브리 성경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나누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방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구약에서부터 이미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결국 야고보의 말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이방 사역을 준비하셨고, 그것을 베드로에게 전하시고 시작하게 하셨으며, 바나바와 바울이 그것을 이어받아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방 사역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야고보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본문 19~21.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더 이상 율법이니 할례니 하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나바와 바울의 주장과 베드로의 증언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결론이다.

단지 이방인들도 믿음의 형제, 자매로 유대인들과 함께해야 하니깐 서로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것을 권고한다.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먹지 않을 것, 종교적 행위로 사제들과 벌이는 음행을 멈출 것, 목매어 죽인 것, 즉 피를 뽑지 않은 것을 먹지 않을 것, 그리고 피 자체를 멀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유대인이라면 어디에 있든지 회당을 통해 교육받은 내용이다.

그래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히 조심하고 지키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적어도 이 네 가지는 지켜줘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맞지 않은 율법의 멍에를 지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율법 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결론 내려진 최초의 예루살렘 종교 회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결정으로 이방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가 한층 더 성숙하고 발전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결론이 야고보에 의해서 내려졌다는 것은 너무나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야고보 장로를 종교적 이념으로 평가하자면 그는 율법주의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가 율법주의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남긴 야고보서만 보더라도 그의 종교적 신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던 갈라디아서 2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은 이방인과 식사하던 베드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율법적인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표현이 단순히 예루살렘 교회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야고보와 신앙적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렇기에 바나바와 바울을 개혁적인 인물로 보고, 베드로를 중립적인 사람으로 본다면, 야고보는 반개혁적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런 야고보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예의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요구를 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그려보았던 야고보의 종교적 이념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야고보가 이 문제의 결론을 내리는 것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 내재 되어 있는 고정 관념을 철저히 버렸다.

그리고 문제와 관련되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에만 집중하였다.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먼저 야고보는 베드로가 전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였다.

가장 신뢰받고 있는 베드로가 같은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신 것을 분명하게 증거했던 것이다.

성령이 거짓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만 성령을 받은 이방인 고넬료는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10여 년 전에 드러난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구약에서부터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전하셨던, 이방인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던 것이다.

 

율법과 상관없이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부터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간의 협소한 생각으로 방해하고 막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의 생각, 신념, 가치보다 하나님의 뜻, 주의 말씀, 보이신 성령의 역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고, 문제의 결정을 내리는 우선적 요소에 두었다.

그렇기에 파격적이면서도 놀라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살려고 노력하고, 구별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껴질 때, 그럴 때 더욱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야 한다.

혹여라도 그것이, 내가 느끼는 나의 거룩함이 나의 눈과 귀를 막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최우선은 성령이고 말씀이었다.

성령의 역사가 확실하고, 주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자신의 가치관, 생각, 이념은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땅끝을 향해 더욱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립되어버린 내 안에 고정 관념을 깨어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찾아 주님 앞에 무릎 꿇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오랜 기간을 지탱해준 믿음의 신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다르게 드러나고,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면.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따르는 우리가, 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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