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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죽다가 살아남. 그래도...(사도행전 14:19-28)

by TwoTalents 2022. 7. 30.

제목 : 죽다가 살아남. 그래도...

 

본문 : 사도행전 14:19~28)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말씀 :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이 진행되는 중에, 루스드라의 사역에서는 놀라운 이적이 동반되었다.

주께서 바울을 통해 기적을 보이셨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이 일어나 걷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의 기적은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사역을 오히려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얼마 전 설교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약에 있어서 표적과 기사는 많은 부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표적과 기사가 그것 자체로 복음일 수는 없지만, 복음을 증언하는 도구이자 수단으로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모든 곳, 모든 경우에서 다 훌륭하고 아름답게만 복음을 증언해 준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거나, 사역자를 교만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파되는 주님이 아닌 전하는 사람이 높아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루스드라에서도 그랬다.

바울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는데, 바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그 기적을 잘못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아닌 바울과 바나바가 신으로 추앙받고 높여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고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루스드라의 사역에 실패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전도 대상자들을 봤을 때는 바라고 기대했던 좋은 상황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좋지 못한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더욱 악화된다.

전도 여행 초기부터 바울 일행을 방해하던 자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본문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대적자들이 루스드라까지 좇아와서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였다.

이것은 마치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갔던 예전의 사울을 보는 듯하다.

어쨌든 이번에는 직접 돌을 던져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바울을 죽일 작정으로 돌을 던졌고,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대적자들은 죽었다고 생각한 바울을 그대로 성 밖으로 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하였다고 한다.

충동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산테스라는 단어로 설득하다’, ‘선동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바로 얼마 전까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앙하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대인 대적자들에게 선동되어 바울을 돌로 치는 것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직접 바울에게 돌을 던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충동되었고, 적어도 바울을 돌로 치는 것에 동조하였거나 묵인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책임이 있듯이 이들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루스드라에서 행해진 바울을 향한 박해는 여러모로 바울의 예전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

 

아무튼 죽었다고 생각해서 바울을 버렸는데, 실상 바울은 죽지 않았다.

본문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이 급작스럽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이 너무 짧아서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학자들의 주장도 다양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실제로 죽었었다고 주장한다.

죽었다가 예수님처럼 부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기록이 너무 짧고 간결하다.

바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그 놀라운 이적을 그냥 이렇게만 기록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바울 역시 여러 서신에서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고린도후서에서 한번 돌에 맞았다라고 언급하지만, 그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주장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바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죽을 것 같은 바울을 하나님께서 치유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바울의 상태는 유대인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리고 제자들도 버려진 바울에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그저 둘러서 있기만 했다.

그랬던 것으로 보아 그들도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도로 바울의 몰골이 처참한데, 그런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바울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치유를 제자들에게 목격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너무 없다.

 

부활이니 치유니 하는 기적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바울이 죽지 않고 그냥 다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 번째 주장에 동의한다.

바울이 죽기 직전까지 돌에 맞은 이 사건에서는 죽음에서 살리시는, 상한 몸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진행될 것이고, 사명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죽음에까지 이를 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바울이다.

그는 죽을 정도의 핍박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일어나 성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하루를 쉬고 다시 더베로 향하여 주께 받은 사명을 이어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죽다 살아남. 그래도.’이다.

이 부분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한 핍박을 받은 바울이다.

하지만 그는 하루가 지나고 다시 더베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에서 변함없이 복음을 전파하였다.

본문 21, 22.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돌에 맞아서 죽음에 이를 뻔한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이 바울의 사명을 막지 못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더베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곳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지막 더베에서의 전도까지 마쳤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그대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베에서 동쪽 길리기아를 통하면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는 더 가까운 길이 있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일부러 자신들이 전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는 수고를 자처한다.

바울 일행에 의해 전도되었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의 형제, 자매들은 분명히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전도팀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던 대적들의 열심은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환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믿음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친다.

 

바울 본인이 그 누구보다 심각한 핍박을 경험했고, 지금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기 직전까지 갔었고, 많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러니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환난 중에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느껴지겠는가?

 

바울은 재방문한 곳에서 성도를 격려하고 가르치는 것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본문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각 교회의 일꾼을 새롭게 세웠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을 일꾼을 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 지역에서 전도된 사람 중에 누군가를 장로로 택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동안 가르침과 경험을 통해 그 지역 성도들의 신앙이 점점 깊어져 갔다고 봐야 한다.

그러다가 개 중에 지도자로 세울 정도의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그 사람을 장로로 택하고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일꾼을 세움으로 교회의 조직도 견고하게 되어 갔다.

 

바울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전도가 미흡했다고 생각되는 지역에서는 다시 한번 전도사역을 진행하였다.

본문 24, 25.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돌아오는 중에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버가는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도시이다.

혹시 그때 설교가 기억나시는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버가에서는 전도에 별다른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전도의 열매가 있었다면 분명히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함께 했던 마가 요한이 이곳에서 팀을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었다.

여러모로 버가에서는 전도팀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다시 말씀을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처음에는 열매가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돌아오는 여정 중에도 사역을 멈추지 않았던 바울과 바나바는 마침내 사명이 시작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문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사도들은 자신들이 처음 파송 받았던 곳으로 돌아와 첫 전도 여행, 첫 사명의 마무리를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교회에 보고하게 된다.

본문 27, 28.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보고를 통해 자신들이 받은 사명, 첫 사역의 주체와 목적을 다시 한번 드러내어 선포하였다.

이 사역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이 여정의 시작과 중간의 과정, 마지막 마무리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로 이루진 것이다.

그렇기에 죽을 것 같은 환란이 있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역의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는 것이었다.

바울을 선택하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주님이 바울을 이방 땅으로 보내어 이방인을 부르시고 세우셨던 것이다.

이렇게 사역의 주체와 목적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기에, 그 힘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온전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보고 후에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학자들은 대부분 이 기간을 1년 정도로 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육체적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사역을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서를 이 기간에 기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난 사역을 복기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니깐 바울은 1여 년 동안 안디옥에 머물려 지난 사역을 돌보면서 다음 사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계속해서 대적들에게 공격을 받았었다.

같은 유대인에게 외면당했고, 그 유대인들이 지역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바울을 핍박하였다.

죽일 듯이 달려드는 바람에 아무 잘못도 없이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루스드라에서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은 일행과 함께 끝까지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다음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죽다가 살아났음에도 사역을 멈추지 않았었는데.

죽다가 살아난 경험을 했음에도 또 다음 사역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주께 받은 사명을 멈출 수 없도록 했을까?

그것은 핍박당했던 성도들에게 격려했던 바울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각 교회에 들러 이렇게 격려했었다.

본문 22.

 

“....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바울은 환란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이제 그 아들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진다는 진리를 바울은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는 그날,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을 믿고 기대하며 오늘의 환란을 견뎌내고,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바울은 특별하지 않았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를 향한 그의 믿음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 믿음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던 것이다.

오늘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허락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죽다가 살아난 경험을 하더라도, 그래도 멈추지 않는 믿음의 여정을 나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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