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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계속되는 전도, 계속되는 방해.(사도행전 14:1-7)

by TwoTalents 2022. 7. 16.

제목 : 계속되는 전도, 계속되는 방해.

 

본문 : 사도행전 14:1~7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 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말씀 :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귀한 열매가 맺혔다.

그런데 풍성한 열매에 비례하여 그들을 향한 박해도 더욱 강해졌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선동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에 의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고, 타협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주께서 보내신 다음 사역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곳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이고니온이다.

 

이고니온도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도시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1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비시디아 안디옥보다도 더욱 발전된 도시였다.

그만큼 사람들도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도 전도를 위해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게 된다.

본문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비시이다 안디옥 때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사전에 회당장과 율법 강론에 관해서 얘기가 오갔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력을 회당 관계자에게 드러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전도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지혜로운 방법이다.

 

예전에 제가 2, 30대 때 찬양선교팀에서 사역한 적이 있었다.

1, 2월이면 팀을 꾸려 전국 투어를 하는 팀이었는데, 매번 집회마다 간증자를 세웠다.

그런데 그때, 가능한 방문한 지역 출신의 단원을 간증자로 세운다.

예를 들어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집회 중 간증자가 나와 저는 여기서 가까운 부산 사람이교회공동체에서 함께하고 있는 김성연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벌써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응이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 문이 많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도 유대인의 회당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이력을 지혜롭게 잘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바울의 노력으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는 반드시 복음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본문에 순종하지 아니하는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자기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다른 이방인들까지 선동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도록 이간질하였다.

본문의 악감을 품게 하거늘은 헬라어로 카코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나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를 끼치다’, ‘악하게 대하다’, ‘해롭게 하다’, ‘상해 하다등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인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가해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오히려 오래 머물게 된다.

본문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머물렀던 기간이 정확하게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오래로 번역된 헬라어 히카노스넉넉한’, ‘적당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고니온의 성도들이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적당하고 넉넉한 기간을 머무르며 형제들과 함께한 것으로 예상된다.

사도들끼리만 핍박을 피해 도망가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대적들이 방해를 하여도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임을 나타내시려고 그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셨다.

 

신약에 있어서 표적과 기사는 많은 부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증언하는 도구이고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가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목적일 수도 없다.

 

예전에 8, 90년대에 이번 추계부흥회의 목적은 전 성도가 방언 받는 것이런 식의 말들을 하곤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부흥회를 방언 받기 위해 한다는 것부터가 웃기는 소리이다.

혹시라도 방언을 통해 그 성도의 신앙이 한층 더 깊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허락하시는 것이다.

방언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 중에 하나라도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면 자신의 믿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런 체험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간구한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모든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고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반면에 귀신이 귀신의 힘을 빌려 능력을 보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부활의 증거로 믿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을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한 증거로 확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이고니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적과 기사를 보았다고 모두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본문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하나님께서 보이신 표적과 기사는 이미 복음에 순종한 이들에게는 또 한 번의 확증이고 기쁨이었다.

하지만 복음에 순종하지 않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미혹시키는 불의한 마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표적과 기사를 체험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표적과 기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훌륭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완악한 인간의 마음은 그것마저도 인정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 열매를 맺으려면 듣는 자가 깨닫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은 표적과 기사가 아니다.

우리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분별하고 믿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표적과 기사가 없더라도 말씀을 통해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복된 믿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도자가 구해야 할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통해,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표적과 기사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역시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다.

전도자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는 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참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기를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타협하지 않고, 변질시키지 않고,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허락하시라고 구하여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드러났던 표적과 기사는 핍박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담대하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였기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비시디아 안디옥 때와 마찬가지로 이고니온에서 복음이 확장되고 복음의 열매가 맺어졌지만, 사역자들을 향한 박해는 오히려 더 가중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문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 더 이상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은 물론 이고니온의 관리들과도 결탁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다.

유대인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실제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관료들의 권력을 의지하는 것에 서슴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바울 일행의 갈등을 굳이 문제라고 본다면, 이것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문제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 문제를 이방인 관리들을 동원하여 해결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도 주님을 로마에 대항하는 내란 선동자로 만들어 실제로는 전혀 상관없는 빌라도의 권력으로 사형선고를 받아냈었다.

바로 이전 선교지였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귀부인들과 유력자들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도시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고니온의 관리들을 동원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인 관료들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안타까운 모습인 것이다.

이미 이들에게는 더 이상 신앙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도, 사람도, 지식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종교라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권력,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은 마치 2022년 한국의 교회와도 너무나 흡사하다.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자체적으로, 혹은 교단 차원에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제를 세상 법정에 나가, 세상 법으로 해결하고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한 대표성을 띤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담임 목회자의 의지로 불법과 편법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왜곡하며,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민망한 고백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고 낯 뜨거운 말을 한다.

 

공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

 

어쨌든 유대인들이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바울과 바나바가 알게 된다.

본문 6, 7.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어떤 경로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알게 되었다.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에게 천사가 찾아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에게 위험을 알려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믿음의 형제 중 누군가가 미리 알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경고해 주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알게 된 바울과 바나바가 즉시 이고니온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개역 성경은 이것을 도망갔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도망갔다라는 표현이 좀 비겁해 보이는가?

어떤 학자는 도망하여의 헬라어 카타퓨고의 뜻에 도망하다외에 피난하다가 있다는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해자들과의 무리한 충돌을 피하려고 다른 곳으로 피난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망이나, 피난이나 본문의 상황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향한 핍박을 피해 도망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며, 이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주님의 뜻이니깐 도망간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핍박 가운데 오랫동안 이고니온의 성도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권력자들이 하나가 되어 박해를 함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귀한 열매가 맺혔던 것이다.

하지만 대적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대적들의 핍박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으로 이제 이고니온을 떠나야 할 때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사역은 거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게 하셨으니깐, 하나님께서 끝내실 것이다.

그때까지는 끝까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음 사역지인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 그리고 그 근방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함없는 모습으로 담대히 복음 전했던 것이다.

복음은 멈추지 않고 전파되었고, 박해는 계속해서 주어졌다.

그 박해로 인해 전도자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간 것이다.

 

오늘 이고니온에서 나타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은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날 전도사역의 대표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그때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핍박하면서 복음을 방해할 것이다.

하지만 담대한 믿음으로 타협 없이 복음은 계속 전파될 것이다.

분노한 대적자들은 온갖 방법, 온갖 세력을 동원하여 복음 전하는 자를 괴롭게 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할 것이고, 주님께서 멈추실 때까지 복음은 계속해서 땅끝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얼마만큼 반복되든지, 이 모든 것을 끝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께 받은 사명이 끝나는 날까지 자신의 생명마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없고,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없다.

오직 주님께서 멈추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나의 달려갈 길을 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가 가라시면 가고, 주가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고.

그렇게 주님의 구령에 발맞추어 오늘도 우리의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타협 없이, 담대하게 세상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람이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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