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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옷을 찢어야 할 일.(사도행전 14:8-18)

by TwoTalents 2022. 7. 18.

제목 : 옷을 찢어야 할 일.

 

본문 : 사도행전 14:8~18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 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말씀 :

지난주 말씀을 짧게 정리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오래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다가 복음을 방해하는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그 관리들이 자신들의 목숨까지 해하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고니온을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자신들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도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도망마저도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으로 새로운 곳에 복음이 전파되는 동력의 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고니온을 도망쳐 나온 바울과 바나바는 오늘 본문에서 루스드라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한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로마 식민지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아무래도 유대인들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회당을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소수의 사람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바울이 선교지로 들어갔을 때마다,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방문했던 전도 전략을 이곳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회당을 이룰만한 유대인이 없고,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도 없는 루스드라에서의 전도는 이전의 전도에 비해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 분명하다.

유대인의 회당이 없는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 그곳에서 거리 설교를 하며 전도했을 것이다.

본문 13절에서 대문 앞이라고 표현된 루스드라의 성문 앞도 그런 곳 중의 한 곳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유대인의 회당이 없다고 하더라도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의 사명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된다.

본문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어떤 한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바울이 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사람을 일으키게 된다.

본문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다.

본문의 듣거늘은 헬라어로 아쿠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관심을 가지고 듣다’, ‘집중해서 듣다’, ‘열심히 듣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미완료형 단어이다.

그러니깐 그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열심히 듣는데, 조금 듣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최선을 다해 들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말씀을 듣는 태도에 주목하였다.

그 사람이 집중해서 드는 모습을 통해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17절에서 이렇게 전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까지 고백했다.

그렇기에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집중해서 말씀을 듣는 그 사람에게서 치유될 수 있는 믿음을 확인한 것이다.

본문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믿음을 확인한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치유를 선포하였다.

바울의 선포와 함께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이 일어나게 되고 걷기까지 하였다.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것이 바울의 능력일 수는 없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 복음을 집중하여 열심히 듣는 이에게서 믿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이적은 분명히 바울을 통한 예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것은 바울을 통해 일어난 이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첫 사례이다.

이고니온에서도 표적과 기사를 언급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지는 않았다.

누가가 이렇게 처음으로 바울을 통한 이적을 구체적인 사례로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베드로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의 이적은 사도행전 3장에 나타나는 베드로를 통한 이적과 너무나 흡사하다.

세세하게 살펴보면 차이 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크게 봤을 때 사람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이적이다.

누가는 본문의 이적을 기록하는 것으로 바울을 베드로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것은 계급적인 의미이거나, 어떤 사람이 주 앞에서 더 크냐, 작냐의 의미가 아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는 이적과 함께 사도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까지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로 전파되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령을 받고 전도 여행을 진행 중이다.

이제 본문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자를 일으키는 것으로 사도행전 후반부의 주인공으로 다시 한번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도 베드로처럼 주께서 세우신 사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쨌든 바울을 통해 일어난 이적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본문 11, 12.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루스드라 신화에서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신들이 가끔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내려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인간의 형상으로 지상에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깐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와 제우스, 즉 자신들의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는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듣지 않고, 바울을 통해 일어난 이적만을 보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들었다.

바울은 그의 들음에서 믿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불편한 몸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음이 없다.

그저 왜 일어났는지 이유도 모르는 기적을 눈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니 오해하고, 자신들의 신화에 연결시켜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뭔가 분주한 것 같기는 한데.

자신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을 하니깐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깜짝 놀랄 행동을 한다.

본문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갑자기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성문 앞에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 앞에 서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게 되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겨 그들 앞에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이다.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사람들이 떠들던 말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일어난 이적에 관한 것이었고.

이적만 보고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바울과 바나바는 비통함에 자신들의 옷을 찢어버린다.

본문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옷을 찢는다는 것은 울분과 비통함을 표현하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모습이다.
이는 큰 슬픔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감정에서 나타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온데간데없고, 자신들이 높여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영광을 받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이며, 분노이고, 두려움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의도치 않게 주님의 영광을 도적질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옷을 찢으며 참람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울과 바나바의 과격한 반응은 사람들을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좋은 마음으로 신께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뿐인데.

막상 신으로 여긴 이들은 옷을 찢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선포한다.

본문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바울은 자신들이 똑같은 사람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들은 신이 아니며, 제사도, 영광도 받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전한 복음과 보인 이적은 지금과 같은 헛된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한다.

신을 형상화하고, 그 형상을 신으로 여겨 제사하고 영광 돌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참된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뿐이며,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한다.

본문 16, 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바울의 설교 내용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상을 상대로 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의 회당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유대인들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도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는 구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의 예언이니, 메시아니 하는 말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바울은 상황에 맞게 메시지에 변화를 준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조건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전했던 것이다.

자연 만물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계속해서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전한다.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셨고, 동일하게 결실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는 은혜로 임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들은 신이 아니며 참된 신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본문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자신들이 아니라고 함에도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제사를 올리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끝까지 그것을 거부하였고, 끝내 그들이 헛된 일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옷을 찢어야 할 일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 옷을 찢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 그리고 절망과 증오를 표현하는 그들의 관습이다.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 앞에서 행해지는 모습이다.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 앞에서 비통해하며 자신들의 옷을 찢었다.

그들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했던 바울과 바나바인데.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들이 영광을 받을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큰 소리를 지르며 부당한 일을 저지하였다.

자기들 딴에는 좋은 마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섬기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겠지만, 그렇더라도 결코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역자에게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는 어리석고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교회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오늘날 우리는 마땅히 옷을 찢어야 할 일에 옷을 찢고 있는가?

비통해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큰소리를 쳐서라도 막아야 할 일을 제대로 막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은 손님이고, 담임 목사가 주인이 되어버린.

예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목사 개인의 말만 풍성해진.

말로는 주님께 영광이지만, 실제로는 목사의 이름만 높아지는.

주님은 낮을 곳을 향하시는데, 목사는 높은 곳만을 향하는.

이런 교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옷을 찢으며 비통해하고 있는가?

혹여 누군가가 나를 높이려고 하면 큰소리를 쳐서라도 막아내고 있는가?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었던 이유를 묵상하며.

우리의 옷을 찢고, 큰 소리로 제지하며.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일이 없는, 하나님보다 더 드러나는 일이 없는,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일이 없는 나이길, 한국의 모든 목회자들이길, 모든 교회이길, 사람이교회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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