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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참된 사랑의 영향력.(사도행전 9:36-43)

by TwoTalents 2022. 7. 30.

이미지 출처 - 인생의 한줄(Tistory)

 

제목 : 참된 사랑의 영향력.

 

본문 : 사도행전 9:36~43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말씀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말하는 핵심을 사랑이라고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모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라고 가르치신다.

요한복음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렇기에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까지 고백한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의 삶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우리의 소망,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

이 모든 것이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

하나님께서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오늘은 믿음의 사람들 개개인이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드러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교회,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처럼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에 잘 드러내고 있는지를 나누어 보려 한다.

 

오늘 본문은 도르가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성경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한다.

본문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55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그곳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다비다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도르가이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도르가가 된다.

둘 다 뜻은 영양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도르가를 여제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제자를 여성형으로 표현한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도르가에게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도르가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도르가의 신실함은 그녀가 행한 선행과 구제로 삶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본문에서는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더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플레레스라는 말로, ‘가득 찬’, ‘완전한이란 뜻을 가진다.

도르가의 삶이 선행과 구제로 가득 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삶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자체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던 도르가가 안타깝게도 병들어 죽게 된 것이다.

본문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그녀가 걸린 병이 어떤 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병은 생명을 앗아갈 만큼 심각한 병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병으로 고생한 기간도 짧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이웃들의 증언으로 볼 때, 아마도 그녀는 심각한 병으로 힘들어하는 중에도 이웃을 향한 선행과 구제를 멈추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사람들은 도르가의 시체를 씻은 뒤 다락에 누인다.

그런데 그러고는 더 이상 장례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

몸에 기름도 바르고 유대 전통에 맞게 장례를 치러야 할 텐데, 그저 시체를 다락에 두고는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본문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그때 당시 룻다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를 찾아간 것이다.

룻다는 도르가가 있는 욥바에서 15~18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걸어서 갈 경우 3~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왕복이면 6~8시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일부러 걸어서 몇 시간 동안 룻다를 찾아가 베드로에게 욥바로 와 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이다.

왜 이랬을까?

두 가지 정도로 추측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욥바의 사람들이 어떠한 기적을 기대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룻다에서 베드로로 인해 중풍병자 애니아가 낫게 되었다는 소문이 이미 욥바에까지 퍼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혹시 도르가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장례도 치르지 않고 시신을 그대로 다락에 두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도르가는 여제자로 불릴 만큼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장례를 특별하게 지내주고 싶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례의 주관을 마침 룻다에 있었던 베드로, 당시 교회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갔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선행과 구제를 베푼 도르가의 마지막을 그녀의 믿음에 맞게 치러주고 싶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맞든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이든지.

욥바의 사람들이 룻다까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도르가를 위함임은 분명하다.

이미 죽은 그녀를 위해 사람들이 룻다까지 베드로를 찾아갈 만큼 그녀는 욥바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인물인 것이다.

베드로를 찾아간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도르가의 믿음과 사랑을 설명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곧 일어나 욥바로 행하게 된다.

본문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욥바로 도착했을 때, 그곳의 과부들이 나서서 베드로에게 도르가의 선행을 증언한다.

그러니깐 이미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욥바에 왔는데, 욥바에서 한 번 더 도르가가 행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도르가는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지어주었었다.

과부는 아이들, 나그네와 함께 당시 사회에서 가장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가장 가난한 자이며 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도르가는 이러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며 도왔던 것이다.

당시의 속옷과 겉옷은 지금처럼 그저 입고 벗는 옷의 개념이 아니다.

이불이자 텐트이며,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광야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어떻게 보면 과부들이 살아가는 것에 희망과도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도르가의 죽음 앞에 진정으로 슬퍼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증언을 모두 들은 다음 그들 전부를 도르가가 있는 다락에서 밖으로 내보낸다.

본문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는 룻다에서 처럼 또 한 번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게 된다.

죽은 도르가를 다시 살려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

대신 베드로가 도르가를 일으키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셨을 때랑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가복음 535~42.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현장에 있었다.

그렇기에 죽은 도르가를 살리면서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해 냈던 것이다.

그가 비록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배운 대로 따라 하는 것으로 이 이적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나타냈던 것이다.

결국, 도르가는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일어나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욥바 사람들에게 알린다.

본문 41, 42.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사람들은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게 된다.

이 일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르가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비록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도르가를 좋아했고, 그녀가 가진 신앙을 존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놀라운 이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후에,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게 된 후에.

도르가가 믿었던 예수그리스도를 자신들도 믿음으로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르가가 살아났지만, 베드로는 곧바로 욥바를 떠나지는 않았다.

본문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욥바에 살고 있었던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던 것이다.

이는 욥바에 머물면서 새 신자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기존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밝힌 대로 죽었던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욥바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도르가가 살아났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도르가에게 일어난 이적만으로도 주님을 믿게 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적이 주님의 역사로서 분명하고 올바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죽은 도르가를 위해서 룻다까지 걸어가는 수고를 하며 베드로를 욥바로 데리고 왔다.

무슨 기대를 가지고 있었든지 모든 것은 오직 도르가를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욥바의 사람들은 도르가를 사랑했고, 그토록 그녀를 사랑한 이유는 도르가가 선행과 구제로 먼저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 때문에 도르가에게 일어난 놀라운 이적을 기뻐하며 도르가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믿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이것이 참된 사랑의 영향력이다.

참된 사랑은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난한 이에게 그저 물질적으로 구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참된 사랑은 그 사람의 육신은 물론 그의 영혼까지도 살릴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고,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을 바르게 잘 실천해야 한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노숙자들에게 주일 예배를 참석하며 점심값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수요일에 노숙자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나가서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저녁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했기 때문에 교회가 그들에게 선행과 구제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전후가 바뀐 모습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선행을 베풀고 그 선행의 근원이 예수그리스도임을 소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예배에 참석하고 점심값 받아가는 사람들, 저녁 식사 제공 받는 사람들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는가?

자신들이 교회에 와주고, 예배 참석해준 대가로 돈을 받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1시간 넘게 사람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주는 돈이 몇 푼 되지 않는다고, 반찬이 시원치 않다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나눈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조건 없이 베푼 도르가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열려진 마음으로 복음이 들어갔을 때,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회가 보여준 사랑 때문에, 성도가 실천한 사랑 때문에...

그 누군가가 감동 받았다는 이야기를 신기해하며 듣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구제를 해도 욕을 들어먹고 있다.

한때, 작은 실수에 대해서는 큰 선행 때문에 덮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나게 구제해도 저지른 잘못이 하도 많아서 그 진정성을 믿지 않고 있다.

거기다가 구제에 조건을 달고, 유익을 따지는 것으로 사랑을 변질시켜 버렸다.

사랑이 변질되니깐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과 성도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새롭게 사랑 정립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르가가 욥바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처럼.

조건 없는 사랑, 진실한 사랑,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 모두가 인정하는 사랑, 나를 내어주는 희생의 사랑,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

그 참된 사랑의 회복으로 세상을 향한 귀한 영향력이 되살아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이 주께 영광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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