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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다툴 수 있다. 갈라설 수도 있다.(사도행전 15:36-41)

by TwoTalents 2022. 8. 17.

 

제목 : 다툴 수 있다. 갈라설 수도 있다.

 

본문 : 사도행전 15:36~41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말씀 :

오늘의 짧은 본문에서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차 전도 여행의 여행지와 목적, 그리고 전도팀이 꾸려지는 모습까지 소개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뜻밖의 다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다툼으로 인하여 험난한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했던 두 사도는 갈라서고 만다.

2차 전도 여행이 계획 단계에서부터 삐걱대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

 

2차 전도 여행은 바울의 제안으로 시작된다.

본문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1차 전도 여행 때는 성령의 명령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세워졌고, 교회가 그들을 안수하고 파송을 했었다.

사도행전 132, 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런데 이런 1차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령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소명은 1차 전도 여행을 지나 더욱 확장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애초에 1차 전도 여행만을 사명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915, 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밝힌 바울의 소명이다.

바울 역시 자신의 소명을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1차 전도 여행을 떠났었고, 이제 2차 전도 여행으로 그것을 이어가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 전도 여행을 통해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던 것이다.

 

바울이 처음 생각했었던 2차 전도 여행의 주된 목적지는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지난 1차 전도 여행을 통해 교회가 세워진 곳을 다시 방문하여 그곳의 형제, 자매들의 믿음을 점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깐 원래 목적은 전도라기보다는 양육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바울의 제안을 바나바는 받아들였다.

그래서 함께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함께 떠날 전도팀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기게 된다.

충돌의 이유는 마가 요한 때문이었다.

본문 37, 38.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가라는 요한은 이전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는 이미 바나바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전도팀으로 동행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가가 1차 전도 여행에 끝까지 함께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고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 일행이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했을 때, 전도팀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전도의 열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별다른 성과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함께 하던 마가 요한이 팀에서 이탈하여 혼자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마가 요한이 전도팀을 이탈한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일은 전도팀을 더 어렵게 했을 것이고 바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나바가 다시 마가와 동행하려고 하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바나바는 마가의 삼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마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꼭 그 이유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나바의 인물됨으로 보았을 때...

마가가 조카이기도 하지만, 소명 받은 사역자로 큰 오점을 남긴 그에게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이름의 뜻이 위로인 것처럼 바나바는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회심은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던 바울을 등용한 사람도 바로 이 바나바이다.

사도행전 1124~26.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의 관점에서는 소명 받은 사역자라도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다.

언제라도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역자도 회복이 필요하고, 힘을 얻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았던 바울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바울이 신뢰하지 않는 마가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바울과는 또 다른 바나바의 소명이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생각은 단호했다.

바울은 버가에서 마가가 떠나고 난 뒤, 전도팀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한다면 전도팀이 붕괴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도사역 자체가 실패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다.

바울은 혹시라도 사람 때문에, 적어도 전도팀의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받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위기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마가와의 동행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사역자도 사역의 대상으로 보고 위로하며 기회를 주기 원했던 바나바.

하나님의 일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어떤 방해 요소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바울.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것인가?

이 두 사람 중에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생각과 가치 모두가 일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역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위로의 사람이었던 바나바도 이번에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 것이다.

본문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본문의 심히 다투어는 헬라어로 파록쉬스모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몹시 격분해서 다툰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지난 1차 전도 여행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서고 말았다.

바나바가 먼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서둘러 떠나버렸다.

 

먼저 떠난 바나바에 이어 바울도 새로운 파트너를 선택하고 그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나가 된다.

이때 바울이 선택한 사람은 실라였다.

본문 40, 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본문의 실라는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예루살렘 공회의 공식 편지를 전달했던 그 실라이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바울은 실라를 눈여겨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 설교 때 나누었던 것처럼 실라는 헬라인 이거나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그는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였다.

그리고 바울처럼 헬라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여 서신을 전달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교회를 향해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던 바울과는 다르게 이미 교회의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러모로 보더라도 바울 입장에서는 실라야 말로 이방 민족을 전도하기 위해 함께할 최적의 파트너인 셈이다.

 

이렇게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이 늦어짐으로 바울이 이끄는 전도팀의 출발도 늦어졌다.

하지만 출발이 늦어진 만큼 바나바에 비해 바울은 좀 더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팀은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은 시작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전도의 시작을 알렸던 위대한 전도자들이다.

그런 바울과 바나바가 보통 사람들처럼 양보 없이 격렬한 다툼을 벌이다가 서로 갈라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싸우는 것을 의아해할 수도 있다.

조금 오버하는 사람은 그들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아해할 일이 아니고,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실망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주께서 세우신 사역자도 다툴 수 있다.

생활 속 문제는 물론 사역에 대해서도 다툼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툼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를 살펴야 하고, 다툼 이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의 문제였고, 관계의 문제였다.

마가 요한이라는 사람과 사역을 함께할지 말지를 다투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역자도 연약한 사람으로 보고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바나바나.

사람보다도 사역을 먼저 생각했던 바울이나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서신을 많이 남겼고, 사도행전의 기록도 많으니깐 바울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나바는 마가와 떠난 이후의 행적이 기록에 없으니깐 바나바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두 사람의 생각과 가치는 모두 일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비록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결론을 내리고 행동했던 것이다.

이 말은 두 사람 모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다른 선택이었지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고, 그 선택을 유지하려고 했기에 그들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역자들의 다툼이 잘못된 것이 아닌 것처럼, 사역자들의 갈라섬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신실한 사역자들이지만 갈라설 수 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옳고 그름이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각자의 신앙에 따라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갈라선 것 뿐이다.

틀린 사람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했고,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 신앙의 가치관이 변함없이 똑같을 수는 없다.

다른 부분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이 양보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는 서로의 올바른 사역을 위해 갈라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모습으로 생각될 것이다.

자신의 신앙적 가치관, 믿음의 신념, 이런 것 조그만 포기하고, 양보라는 말로 멋있게 포장하면서 함께한다면, 사람들이 인정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과를 얻는 사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는 사역, 믿음 안에서 신실한 사역이 참된 사역이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신앙의 차이를 가진 사역자들은 모두 다투어야 하고, 다 갈라서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합의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어서 그것으로 인해 다투고, 갈라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사역자들이 양보할 줄 모른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랑이 없다고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다름이 확실하고, 서로의 신앙이 부딪히지만.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열매,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어서 함께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진실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은 겸손인가?

성공을 위해 타협하는 것은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서는 모이는 것은 긍정적이고 흩어지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용납은 긍정적인데 다툼은 부정적이다.

연합은 긍정적인데 갈라섬은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경우에서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이듯이 주의 이름으로 흩어질 수 있다.

주의 이름으로 용납하듯이 주의 이름으로 다투어야 할 때도 있다.

주의 이름으로 하나 되듯이 주의 이름으로 갈라설 수 있다는 말이다.

혹시라도 고착되어 버린 고정관념이 있다면, 그것을 깨어버리고, 겉모습이 아닌 속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다투었으니깐, 갈라섰으니깐, 그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다투었는지, 무슨 이유로 갈라섰는지를 살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보다 넓고, 보다 깊고, 보다 높은 마음으로 문제의 겉과 함께 속 내용을 살필 수 있기를...

그렇게 교회를, 세상을, 사람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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