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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바른 관계 (사도행전 9:26~31)

by TwoTalents 2022. 2. 15.

이미지 출처 - 국민일보

 

제목 : 바른 관계

 

본문 : 사도행전 9:26~31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말씀 : 

오늘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삶에 있어서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참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현대에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으로까지 인정될 정도이다.

어느 한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력이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재력이나 재능을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라도 인맥이, 즉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야 하는 것일까?

상대방에게 웃음 띤 얼굴로 좋은 말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주면 되는 것인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상대방을 향한 칭찬이 많아지면 관계가 좋아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칭찬과 아첨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구분이 되기는 한 것인가?

또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인 관계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는 성공적인 관계는 같은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깊이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 그가 맺어왔던 관계성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전 맺었던 관계와는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사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관계를 맺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들과 적대적 관계였다.

그런데 이제는 믿음 안에서 형제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본문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먼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다가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울을 피한다.

사람들이 왜 피하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위협적이고 살기 가득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사울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이다.

물론 사울이 스스로 다가와서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문도 이미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문만으로, 사울의 말만 듣고, 그가 회심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교회 내부에 잠입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울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사울의 말만 듣고 그의 회개를 인정할 만큼의 관계성이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맺어지기 힘든 관계 사이에 중재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바나바이다.

본문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본문의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놓았던 그 바나바이다.

사도행전 436, 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사도들과 성도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바나바가 사울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사울이 어떻게 주를 만났고, 주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나바와 사울 사이에는 이미 이런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나바가 사울의 회심을 어떻게 인정하게 되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다.

어쨌든 바나바는 사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변호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바나바의 변호가 효과를 보게 된다.

성도들이 소문도 믿지 않았고, 사울의 말도 믿지 못했지만, 바나바의 말은 믿고 인정한 것이다.

본문 28, 29a.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바나바의 증언으로 사울은 드디어 제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는 복음도 교회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듯 어떤 집단과 불신으로 가득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신뢰하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공통의 사람과 우선적으로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울이 바나바와 신뢰 관계를 먼저 형성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바나바가 사울의 변호를 하지 않았다면.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의 형제로 인정받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쨌든 적대적 관계였던 예루살렘 교회와 사울의 관계는 믿음의 형제 관계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이것과는 반대로 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전에 같은 가치관을 가졌던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본문 29b.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69, 10.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이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고, 이제는 스데반을 죽였던 것처럼 사울도 죽이려고 힘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잘못을 들추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던 이유가 그들의 잘못을 들춰냈기 때문이었다.

스데반은 구약에서부터 선지자들이 예비했던 메시아가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설교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난 것에 대해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던 것이다.

아마도 사울은 그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에 대해 말하며,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밝혔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 대해 유대인들은 여전히 뉘우침 없이 잘못을 들춰내는 것에 분노하며 사울마저도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을 때, 그 일을 옳게 여기며 자신들의 겉옷을 맡아주었던 사울이 아닌가?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사울도 공범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오히려 자신들을 비판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니깐 분노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입장에서 사울은 자신들을 배신한 배반자인 것이다.

이렇게 사울은 예전의 동조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믿음의 형제들이 사울을 살리기 위해 그를 피신 시킨다.

본문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이런 모습도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의 사울은 자신들과 적대적인 관계였고,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믿음의 형제, 자매를 잡으려던 원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가 된 것이다.

이렇듯 주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사울은 그가 맺어온 모든 관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는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씀의 서두에서 성공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나누었다.

세상은 가능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사람에게 관계를 성공적이게 잘 했다고 인정해 준다.

사울의 경우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는 좋은 관계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적대적이게 되어버렸다.

사울은 회심 이전과 이후, 관계의 역전만 있을 뿐 여전히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관계에 있어서 실패한 것인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관계가 악화되어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사울의 철저한 실패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성공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마냥 좋은 관계, 그저 웃는 관계, 무조건 내 편인 관계.

이런 것은 세상에서나 인정하는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니라, 바른 관계이다.

서로가 만족하는 좋은 관계이지만, 그 관계가 바르지 못한 관계일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아니면 양쪽 모두 불편해하는 관계이지만, 그 관계가 바른 관계일 수도 있다.

세속의 기준대로라면 유대인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으로 죽임을 당했던 스데반을 사울이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좋은 말로 칭찬도 하고, 아부도 하면서 달래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이 아닌 말로 연결된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음을 전해봤자 이미 복음이 아니며, 결과에 상관없이 그 전도는 실패한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바로 전했다면, 당장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그 전도는 성공한 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을 모으고, 그들의 헌금으로 커다란 예배당을 건축했다고 성공한 사역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맺혀지는 열매가 없고, 지난달이나 이번 달이나 변함없이 다가오는 말일에 월세 걱정을 해야 한다고 해서, 그 사역을 실패한 사역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복음을 왜곡하고, 사람에게 아첨하고, 세속의 복이나 팔고 있었다면 그것은 실패한 사역이다.

가난의 두려움, 부족함의 두려움, 외면의 두려움 속에서도 모든 것을 극복하고 끝까지 진리를 말하고, 진리 안에서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성공한 놀라운 사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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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관계가 아닌 바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본문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말씀 마무리.

누가복음 125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주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참과 거짓을 모두 포용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바른 관계로의 변화를 말씀하신다.

정의와 불의가 대립하고, 진리와 거짓이 다투게 될 때.

법을 지키는 자와 불법을 행하는 자가 논쟁하며, 선과 악이 충돌할 때.

우리는 좋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름을 선택하여야 한다.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건강한 교회로 나아가는 성공적인 관계 형성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 형성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에서 그렇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관계를 선택하여야 하는가?

좋은 관계를 위해서 바른 관계를 포기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바른 관계를 위해서라면 좋은 관계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아서....

날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켜나가고,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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