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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땅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사도행전 9:1-19a)

by TwoTalents 2022. 1. 14.

제목 : 땅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본문 : 사도행전 9:1~19a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말씀 :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를 넘어 세상을 향해 땅끝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는 역사하고 있었지만, 사마리아와 세상을 향해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중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주의 종 스데반이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유대교에 지나치도록 열심이었던 자들에 의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스데반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핍박이 가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이 진행되는 계기가 된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예수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세상으로 땅끝을 향해 나아가게 된 것이다.

흩어진 주님의 제자들이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이 세상을 향해, 이방 민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가운데 또 하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방 선교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게 될 사람을 주께서 부르시는 장면이다.

주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바로 사울이다.

이 사울은 후에 바울로 불리는 그 사울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 주님이 이 사울을 부르신다는 것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울이 누구인가?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다.

이 말은 그가 철저한 유대주의자, 철저한 율법주의자라는 말과도 같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늘 대립했던 세력 중의 하나가 이들이 유대주의자, 율법주의자,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사울이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그는 교회에 본격적으로 박해가 가해진 원인이 되었던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옳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거칠게 표현해서 사울은 스데반이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었다는 말이다.

스데반에게 직접 돌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아준 사람이다.

겉옷을 맡아줌으로 마음 편안하게 마구 돌을 던질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되어 사울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된다.

본문 1, 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이는 것에 간접적으로 동참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직접 나서서 교회를 핍박한다.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사울은 스데반과 그의 집단이 가짜라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제사장을 찾아간다.

자기가 알아서 제사장을 찾아가서는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의 도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 올 수 있도록 공문을 써 달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도 먼 거리인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먼 거리이다.

그런데 그 길을 그리스도인을 붙잡으러 가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것에 너무나도 적극적이게 되어버린 사울이다.

 

그런데 이런 사울을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것이다.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교회를 위협하는 사울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어쨌든 사울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향하게 된다.

본문의 표현대로 살기 등등하게 씩씩거리며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다메섹을 가던 도중에 초자연적인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하늘로부터 한 빛이 자신을 두르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본문 3, 4.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는데 갑자기 한 빛이 사울을 감싸고 사방에서 그를 비추었다.

그것 때문에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럽게 빛이 사방에서 자신을 비춰오다 보니, 너무 눈부시고,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이 엎드러져 있을 때, 그 빛과 함께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게 된다.

 

사울아, 사울아 어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살기 등등하게 흥분해서는 그리스도인을 잡겠다고 씩씩거리며, 반이성적으로 격앙되어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빛이 자기에게 다가오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그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고.

사울은 간신히 들려오는 목소리를 향해 질문을 한다.

본문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사울은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누구시냐는 사울의 질문에 그 목소리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대답한다.

여러분, 이 대답을 들었을 때, 사울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제 여기서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사울은 이제껏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괴롭혀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하게 다메섹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초자연적인 현상과 함께 한목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에 주인공이 자신을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괴롭히는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생각지 않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신다.

본문 6, 7.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네 이놈, 니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괴롭혀? 죽고 싶냐?’

뭐 이 정도는 말씀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유대 지도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독사의 자식아,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이렇게 협박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말씀 전혀 하지 않으신다.

단지 놀라서 말도 헛나오고 있는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그곳으로 가면 사울이 할 바에 대해 이를 자가 있을 테니 그 사람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을 뿐 사방에 비춰진 빛 같은 것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이것은 오직 예수께서 사울만을 위해 이 일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울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서 초자연적 현상으로 그에게 충격을 주신 것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빛과 음성은 사라졌지만, 사울은 놀라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본문 8, 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주의 음성을 들은 뒤에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빛과 음성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살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다메섹을 향했던 사울이, 이제 다메섹 앞에서 나자빠져서는, 눈도 보이지 않아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간신히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울은 지금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흘 동안 밥은커녕 물도 마시지 못할 정도로 혼돈에 빠져버린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바울이 사흘 내내 회개의 기도를 올렸을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런데 바울이 곧바로 회개했겠는가?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처음에는 멍하니 그냥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조금씩 진정을 하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을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와 죽음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그동안 보았거나 들었던 예수의 행적에 대해서도 되새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던 사방의 빛과 예수의 목소리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상컨대 사울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렵고, 떨리고, 무섭고, 제발 꿈이길 바라는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울이 이러고 있는 중에 장면이 바뀌게 된다.

사울을 위해 준비하신 사람, 아나니아가 등장한다.

본문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아나니아는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졌던 핍박 때문에 다메섹으로 도망온 그리스도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깐 원래 다메섹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는 사울과는 다르게 예수와 교회에 대해 신실하고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였다.

그런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하나의 사명을 주신다.

본문 11, 12.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주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신 이유는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 그에게 안수하고 그가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사울에게는 이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와 안수해 줄 것이라고 전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임무가 아나니아에게는 쉽게 수긍하기 힘든 임무였다.

본문 13, 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은 교인들 사이에 유명한 핍박자였다.

이미 사울의 소문이 다메섹에까지 퍼져 있었던 것이다.

아나니아도 사울이 어떻게 교회를 핍박했고, 어떤 마음으로 다메섹에 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찾아가 그를 위해 안수하라니, 참으로 난감한 주님의 말씀인 것이다.

아나니아는 주님께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그가 다메섹에 온 목적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이것은 주께서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실 것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아실 것을 믿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울에게 자신을 보내시고, 안수까지 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본문 15, 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울은 주께서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방인과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게 하시려고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신 주께서 필요하셔서 당신이 선택하셨다는데,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사람들의 이해나 수긍.

이것보다 위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지혜보다 뛰어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주님은 사울이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앞으로 소개되겠지만, 사울의 여러 이력을 보았을 때.

주님은 이방인과 임금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신의 이름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이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우신 사역자라고 하더라도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 중에는 반드시 고난이 닥칠 것이다.

저는 고난을 대하는 사울의 모습은 분명 남다를 것이라고 예상된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데도 어려움이 닥치면, 순간 억울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다를 것이다.

그는 억울함이나 불평보다 이전에 교회에 핍박을 가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오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교회에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성도들에게 더 열심히 핍박을 가했던 사울이었다.

사울은 그런 자신을 기억하며, 지금의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이신 예수님의 절묘한 신의 한 수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수님의 대답에 아나니아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일어나 사울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본문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을 찾아갔고, 그를 보자마자 형제라고 부르며 주님의 일에 완전히 동참한다.

이런 아나니아의 순종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확실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을 잡으려고 거의 300km가 떨어진 다메섹까지 온 사울이다.

사울의 눈이 보이게 되면 그가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이런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낸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놀라운 순종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주님은 이방인을 위해 세우실 사울을 부르시려고, 아나니아라는 가장 적절한 믿음의 형제를 예비하신 것이다.

 

결국,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게 되고, 사울의 눈은 다시 보이게 된다.

본문 18, 19a.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의 눈은 다시 예전처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도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것으로 음식을 먹고 강건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말씀 마무리.

세상을 향한 복음의 여정은 이렇게 주님의 계획하심으로 하나하나 이루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과 마주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때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질문할 수도 있다.

주님은 성도의 선한 질문에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나의 생각, 나의 의견을 내려놓는 겸손함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로써는 사울이라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주님은 들어 사용하셨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기도하며, 묵상하며, 말씀을 실천하며.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에 우리를 맡기는 2022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가 막힌 주님의 역사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사울의 눈이 열리고, 그가 강건해졌던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의 믿음이 강건해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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