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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사울의 변화 (사도행전 9:19b~25)

by TwoTalents 2022. 2. 5.

이미지 출처 - GS칼텍스 미디어허브

제목 : 사울의 변화.

 

본문 : 사도행전 9:19b~25

19.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말씀 :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울의 삶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자기 스스로 일부러 대제사장을 찾아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을 수 있도록 공문을 요구했던 사울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예수를 박해하는 자였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로부터, 자신이 없애려고 했던 그리스도의 도를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전할 사역자로 부르심받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이 사울에게 얼마나 강렬하고 충격적이었던지, 바로 며칠 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으로 사울은 등장하게 된다.

오늘은 이러한 사울의 변화를 나누어 볼 것이다.

 

놀라운 경험을 한 사울은 일단 다메섹에 머물면서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하게 된다.

본문 19b.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이 다메섹에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무엇을 했을 것 같은가?

당연히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각자가 만난 예수님을 사울에게 나누면서 자신들이 받았던 은혜를 증거했을 것이다.

사울은 제자들의 간증을 들으며 자신에게 나타났던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스스로 경험한 일들을 믿음으로 해석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받은 소명에 대해 확신을 더 해 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즉시로 회당으로 나아가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본문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불과 며칠 전의 사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예수의 도를 따르는 이들을 잡겠다고 일부러 다메섹을 찾았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파하려고 일부러 회당을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굳이 강조하면서 새신자나 초신자들에게 전도의 부담을 주는 목회자들이 있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자마자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르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신자나 초신자에게 바울을 빗대어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한 설교이다.

바울은, 그러니깐 본문의 사울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한 케이스의 사람이다.

그의 화려한 스펙 때문에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울을 특별히 부르셨다는 말이다.

본인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고,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고 망치는 것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인데.

그런 그를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도자로 주께서 주권적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런 부르심은 성경에도 흔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사실을 회당에서 전파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신자에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구약성경에 해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초자연적 경험을 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바울일 수 없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특별히 선택된 주님의 그릇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사람이 바울일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바울이 될 수 있지 않으냐?

그러니 그 바울일 수 있는 한 명을 위해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다.

그런 논리라면 아예 성경대로.

하나님께서 먼저 바울처럼 될 그 사람을 찾아가셔서 영적으로 충격을 주시고, 그다음에 근처의 목회자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셔서, 그에게 힘을 보태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맞지 않는가?

그런 주님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 그 사람을 찾아가면 되지 않은가?

 

이런 것이 성경을 교묘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앞서도 밝혔지만,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가르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굳이 바울이 다메섹에서 변화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을 전파한 사실을 초신자, 새신자에게 빗대어서 가르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성경의 인물 중에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동기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거 아주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바울을 새신자, 초신자에게 적용하면서 동기화시킴으로 마치 그들이 바울처럼 전도를 위해 사명 받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진정으로 주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인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자 되심을 모른 채 그저 죽어가는 영혼이 너무나 불쌍해서인가?

 

무슨 의도이든 성경까지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가 정당할 수 있는가?

자기 교회를 사람들로 채우기 위한 욕망 때문은 아닌가?

세속의 기준에서 성공한 목회자, 성공한 교회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은 아닌가?

 

초신자, 새신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은 전도가 아니다.

이제 예수님을 알게 된 그들이 예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말씀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예배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가장 먼저 나누어야 한다.

그러는 중에 받은 은혜가 커서 자발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이웃에게 나누고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케이스인 것이다.

 

사울도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전파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너무 변해버린 사울의 모습이다.

이는 그의 경험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해박한 성경 지식도 변화의 한몫을 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경험을 성경으로 해석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밖에 결론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부분은 본문이 유일하다.

 

사울의 이런 변화와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그저 놀라운 일이었다.

본문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유대인들의 생각에 사울의 변화는 예상하기도 힘든 변화였다.

다른 사람은 혹시나 몰라도 사울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어떻게 왔는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완전히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당혹스러운 것이다.

이는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울의 변화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

그들에 눈에는 전도유망하고 똑똑했던 유대교의 바리새인 청년이, 예수 당이라는 이상한 이단에 빠져서는,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그것을 따르고 그 거짓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좋게 봐 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울은 멈추지 않는다.

본문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오히려 사울은 힘을 더 낸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열심히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울의 모습에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러워한다.

변해버린 그의 모습도 당혹스럽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도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며칠 전까지 예수의 도가 가짜라며 그 도를 따르는 자를 감옥에 잡아넣겠다고 눈을 부라렸던 사람이.

갑자기 그 도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메섹에서의 이런 상황은 꽤 긴 시간 진행되었다.

본문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본문의 여러 날은 헬라어로 히카노스 헤메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넉넉한 시간’, 그러니깐 꽤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단어 때문에 갈라디아서에서 사울이 고백한 3년 동안의 아라비아 방문을 본문의 22절과 23절 사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저는 사울의 아라비아 방문을 본문 25절과 다음 주 본문인 26절 사이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 관점으로 계속 말씀을 나누겠다.

 

다메섹에서 당혹스러운 사울의 전도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인들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사울에게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사울은 유대교에 너무나 열심이었고, 예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 당분간은 그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을 보내어 정신 차리라고 회유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다시 예전의 사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거기다가 복음 전파의 열매를 이미 맺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은 사울을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울을 죽여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사울에게 알려진다.

본문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유대인들은 배신자 사울을 죽이려고 의지를 단단히 하였다.

사울이 살아서는 다메섹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밤이든 낮이든 성문까지 지켰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고, 몇 명의 사람이 필요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울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에게 닥친 첫 번째 고난이다.

이 고난과 함께 사울은 유대교의 배신자로 확정되고 계속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첫 번째 고난을 사울은 자신의 열매를 통해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본문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본문의 그의 제자들에서 예수라고 해석하는 학자가 있고, ‘사울자신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만약 예수라면 사울의 회심을 믿고 확신하는 것으로 그를 진정한 믿음의 형제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왔다는 것이 된다.

그것이 아니라 사울 자신이라면, 다메섹에서부터 복음의 열매를 맺어서 사울에게 배우는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어느 쪽이 맞든지 사울에게는 믿음의 열매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사울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첫 번째 고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사울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사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일들이 기억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고생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어리석었던 자신의 지난날이 떠 올랐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 자신을 피해 숨어야 했고, 불안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두려움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유대인들에게는 불쌍한 마음을, 도망쳐야만 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울은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고난을 받더라도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으로 고난 중에도 받은 소명을 기뻐하며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울이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죽이려 했던 사울을 살리려 하는 사울로 변화시키셨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의 변화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진정으로 만났기에 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사울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니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만났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밖에 없는 삶임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찬양을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를 나를 변화시키시는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매일 매일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으로 매일 매일 주님의 모습처럼 변화되어 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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