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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예수님과 같았다.(사도행전 7:54-60)

by TwoTalents 2021. 12. 5.

제목 : 예수님과 같았다.

 

본문 : 사도행전 7:54~60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말씀 :

지난주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공회로까지 끌려가게 된 스데반에 대해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함하면서 거짓 증거를 남발하는 가운데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묵묵히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전파하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고발을 당해 취조를 받는 상황임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가감 없이 지적하였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일어나는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함께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위해 보내신 선지자들, 하지만 그들을 외면한 이스라엘의 조상들, 성막과 성전, 그리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와 그 메시아를 죽인 유대인들에 대해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온전히 설교할 수 있었다.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듣고 난 뒤 스데반을 고발했던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본문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지지난 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무조건 아멘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들이 스데반의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게 되었다.

이를 갈았다는 것은 분노했다는 말이다.

본문의 찔려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던 것과는 다른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행전 237절에 사용된 찔려는 헬라어로 카타닛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찌르다’, ‘동요시키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깐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따라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찔려는 헬라어 디아프리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찌르다’, ‘성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니깐 본문에서는 스데반이 자신들의 아픈 데를 찌르니깐 그것이 아픈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며 분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가 진리인지 아닌지 이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잘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자꾸만 자신들의 마음을 거스르니깐.

그냥 분노를 느끼고 적이 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분노에 찬 마음으로 흥분하고 있다.

조금만 더 스데반이 자신들의 아픈 곳을 찌르면 바로 돌로 그를 칠 기색이다.

 

그런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가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난리의 당사자인 스데반이었다.

본문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진리를 전했음에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분노뿐이었다.

하지만, 스데반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혼란스러움에도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충만함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스데반이 실제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고,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어느 것이 맞든지, 중요한 것은 당장 위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스데반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말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이렇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게 된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의 말을 유대인들이 달갑게 받아들이겠는가?

스데반의 증거는 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분노한 유대인들의 화를 더 부추기게 되는 것이다.

진짜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를 본 것이라면, 스데반의 말처럼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인 것이 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의 입장에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해서도 안 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발악하며 스데반의 증거를 거부한다.

본문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더 이상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들을 수가 없다.

? 스데반의 말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찌르고, 잘못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서 험악한 분위기로 스데반을 협박했지만, 스데반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진리를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스데반이 위기에 빠진 상황인데.

너무나 평안하고, 너무나 당당한 스데반의 모습 때문에 오히려 그를 고발한 유대인들이 더 조급할 따름이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흥분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가게 된다.

본문 58, 59상반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간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진다.

살아있는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으니깐, 스데반을 죽여서라도 그의 입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의 옷을 맡았던 사울, 바로 바울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바울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스데반의 재판을 계기로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과 그가 스데반의 순교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돌로 친다는 것은 스데반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다.

자기들끼리 사형을 선고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허가가 있어야 집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보내졌고, 그에게 다시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자기들 마음대로 사형을 집행했다가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지금 이들의 상태가 통제 불능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스데반에 의한 진리의 도발이 죄악 된 그들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괴롭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복음의 진리 앞에 마지막 발악을 하는 사탄의 세력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진리를 이겨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탄의 처절한 발버둥과 같은 모습을 하고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데.

스데반은 그 돌을 맞으며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59절 하반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은 이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다.

그는 이미 예수의 이름 때문에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긴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는 저 유대인을 위해서도 주님께 중보 기도를 한다.

본문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 복음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 진리를 전하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

그들이 저지른 죄를 그들 자신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여러분, 스데반의 이런 모습은 어디서 본듯한, 어딘가에서 들은 듯한 모습 아닌가?

예수님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수님과 같았다입니다.

무엇이 예수님과 같았다는 것인가?

스데반의 삶이 예수님과 같았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과 같았다는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이 예수님과 같았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어떠한 계기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예수의 제자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서 예수님께 배운 대로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 했던 것이다.

 

스데반의 아름다움은 이 사실에 있다.

스데반이 재판받는 중에 사람들이 분노하여 그를 돌로 치려고 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들려 돌을 든 자들의 손을 멈추게 하시고, 천사들이 내려와 스데반을 변호하며, 그의 복음을 증거해 주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스데반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스데반을 공격하는 중에 그는 홀로 그 무대의 중앙에 서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외롭고, 초라한 모습의 스데반이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가장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천사와 같은 얼굴의 스데반을 보며 놀라워했다.

모함과 거짓 증거가 난무하는 중에도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게 되었다.

스데반은 그렇게 믿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원수를 용서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공동체 여러분.

그리고 함께 예배하는 예배공동체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완벽한 증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내가 재현해 내는 것이다.

입으로 아무리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전한다고 하여도, 우리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따르고 믿는다는 예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자신을 죽이기까지 한 이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용서하셨다.

스데반은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였다.

자신을 죽이기까지 한 이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중보하고 용서하였다.

우리도 죽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를 죽이기라도 하듯이 공격하는 이들을 위해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중보하며 용서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중간중간 계속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라도 다음번에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부끄러운 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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