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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죽음 앞에서 스데반은...(사도행전 7:1-53)

by TwoTalents 2021. 11. 28.

 

제목 : 죽음 앞에서 스데반은...

 

본문 : 사도행전 7:1~53

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말씀 :

스데반이 모함을 받아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스데반은 피의자의 입장이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피의자는 재판에서 어떻게 하는가?

변호사를 통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직접 하든지 자신이 고발당한 건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무죄를 받거나, 무죄가 아니더라도 형을 가볍게 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재판을 받는 스데반의 모습은 이런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지난주 본문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모함하고, 누명을 씌우는 와중에도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스데반이었다.

본문의 스데반은 그 천사와 같은 얼굴로 자신에게 사형이 선고될 수도 있는 재판정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전혀 예상밖에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오늘은 죽음 앞에 서 있었던 스데반의 모습에 대해 나눌 것이다.

 

오늘 본문은 본문 전체가 스데반의 설교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가장 긴 설교이면서, 사도가 아닌 사람이 전하는 첫 번째 설교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본문 2~4.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일을 상기시킨다.

스데반은 이렇게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고 이후에 나누게 될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임은 강조하는 것이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역사를 선별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거절했던 일들에 대해 강조한다.

먼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본문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는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내용이다.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 대하여 열 명의 형들이 시기하고 질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질투가 동생을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

사람의 질투가 이토록 인간을 악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시작부터 이렇게 선택받은 자를 다른 사람들이 질투하고 시기하는 모습이 나타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제들은 선택받은 동생을 거절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셨다.

본문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세워지게 하셨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와 함께 앞으로 닥칠 재앙에 대한 완벽한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바로에게 신임을 받아 총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환난 중에도 승승장구하던 요셉은 결국,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을 살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낸다.

본문 11~17.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이스라엘이 흉년으로 인하여 가만히 있다가는 죽음에 이를 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요셉에 의해서 해결된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핍박하고, 팔아버렸던 동생 때문에 생명을 구원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으로 인하여 애굽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스데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했던 애굽의 새로운 바로가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본문 18, 19.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애굽의 바로는 노예인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산파를 시켜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아이 중에 아들이면 그 즉시 죽이라고 명령한다.

스데반은 아마도 일부러 이 부분을 강조한 것 같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때에 헤롯 대왕이 자행했던 유아 살해 사건을 떠올리기 위함인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괴로움을 보셨고,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기로 작정하셨다.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약속을 이행하시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셨고, 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셨다.

본문 34, 35.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거절하였다.

그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기 전에도 거절했었고, 보내심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보이신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고서야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따르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모세에 대해서 신뢰했다가 거절하기를 반복했었다.

 

급기야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세우기까지 한다.

본문 39~41.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놀라운 이적을 보이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거절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한 것과 같은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스라엘의 타락은 더욱 심해졌다.

산으로 올라간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하나님은 당장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모세보다, 비록 쇳덩이일지언정 눈에 보이는 우상을 더욱 기뻐했던 것이다.

스데반은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계속해서 배교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거절했던 이스라엘의 이력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이제 설교의 주제는 성막과 성전으로 옮겨진다.

이것은 아마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는 고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스데반은 성막의 역사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본문 44, 45.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스데반은 성막의 기원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성막이 전쟁의 승리와 약속의 땅을 점령해 나갈 때마다 함께했음도 고백한다.

이는 스데반 자신이 성막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결코 모세를 모독하지 않았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은 성전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성전은 다윗이 준비하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위해 건축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지만 그런 성전이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본문 48절 상반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존재는 성전으로 제한될 수 없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성전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스데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서 잘못된 성전의 인식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본문 48절 하반절에서 50.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성전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성전은 단지 건물일 뿐이다.

실제 하나님의 집,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일 수 없다.

굳이 구분한다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는 대표적인 곳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성전에 관한 중요한 의미만을 기억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성전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 때문에, 성전에 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 변질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 자체보다 성전에 배치된 제사 도구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건물인 성전을 섬기게 되고.

이것은 엄연히 우상 숭배다.

 

이처럼 스데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자를 거부하고, 성막과 성전 등으로 변질되어버린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스데반은 이렇게 일갈한다.

본문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본문의 목이 곧고라는 말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하셨을 때 사용하신 표현이다.

스데반이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스데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질책받았던, 금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었던, 하나님과 모세를 거부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떼를 썼던...

그 어리석었던 자신들의 조상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대하는 모습까지도 조상들과 똑같다고 지적한다.

본문 52, 53.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박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조상들은 오실 의인,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고한 하나님의 사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사도행전 당시의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신 의인, 즉 오신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이다.

 

결국, 스데반이 전하는 설교의 결론은 이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신다고 예언한 의인이시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메시아를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이더니...

그 자손들은 지금 재판장에서 스데반을 재판하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모함하고 누명을 씌워서, 하나님의 아들을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백성이면서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말씀을 저버리고 외면하는 엄청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말씀의 서두에 밝혔듯이 스데반은 지금 피의자로 재판을 받는 상황이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세를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존경하는 대제사장님이러면서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혐의를 벗든지, 징계가 가벼워지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데반은 자기를 변호하거나, 자신을 모함한 자들을 맞고발한다거나 그렇게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재판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과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전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선지자를 거부하였고, 메시아를 거절한 이스라엘을 향해 질책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이들을 꾸중하면서, 다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재판이 스데반 입장에서 잘못되면 그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스데반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을 모독한 죄, 모세를 모독한 죄가 성립되면 당연히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 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리스도를 부당하게 죽인 그들을 깨우치려고 한다.

이것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스데반의 모습이다.

 

지난주에 주어진 질문을 다시 한번 할 수밖에 없다.

스데반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설교는 따로 결론 내리지 않고, 이 질문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 주간동안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천사와 같은 얼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스데반을 생각해 보기를 소망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귀한 깨달음을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

그와 함께 예수를 닮은 스데반처럼, 스데반을 닮은 우리가 될 수 있게 하시길...

스데반과 같은 믿음의 용기를,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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