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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그 와중에도 스데반은...(사도행전 6:8-15)

by TwoTalents 2021. 11. 25.

제목 : 그 와중에도 스데반은...
 
본문 : 사도행전 6:8~15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말씀 :
오늘은 사도행전 6:8~15절까지를 본문으로 ‘그 와중에도 스데반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지난주에 예루살렘 교회가 성도들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일곱 명의 새로운 사역자를 세웠던 것을 나누었다.
이것은 차별받았던 헬라파 과부들을 위한 조치였다.
그녀들을 위해서 헬라파 유대인 일곱 명을 사역자로 세웠는데, 그 일곱 명의 사역자 중에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이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일곱 명의 사역자를 새롭게 세울 때, 그 기준은 이러했다.
사도행전 6장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이 말씀을 통해서 스데반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았던 인물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스데반이 충분히 훌륭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그에 대해서 본문은 다시 한번 소개한다.
본문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와 권능까지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통한 큰 기사와 표적이 민간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본문의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5장 12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기사와 표적’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같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같은 기사와 표적이 스데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스데반은 그야말로 사도급의 사람인 것이다.
신앙의 등급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쉽게 표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도들만큼이나 스데반이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데반이 어느 날 교회 밖의 사람들과 회당에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본문 9, 10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본문을 개역한글 버전으로 보면 앞부분의 뜻이 불확실하다.
본문의 ‘자유민들’이 개역한글 버전에는 ‘리버디노’라고 되어있다.
그래서 ‘리버디노’를 뒤에 나오는 다른 지역들처럼 어떤 한 지역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부터는 번역이 수정되어 그 뜻이 좀 더 명확하게 되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네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온 자유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그 지역으로 노예로 끌려갔다가 자유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로 해석한다.
그러니깐 결국 이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이다.
어쨌든 그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회당을 만들어서 모였는데, 스데반이 그 회당에서 논쟁을 벌인 것이다.
스데반 자신도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성경에 관한 것, 예언된 메시아에 관한 논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헬라파 회당 사람들이 스데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에 오히려 반감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질문도 많이 받는 부분인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맞지 않는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을 근거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그것이 참된 복음이라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주장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이런 주장이 맞다면, 예수님도 가짜가 된다.
말씀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도들 역시 모두 대적자들에 의해 순교 당했고, 오늘 얘기하고 있는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능력 있는 것은 사실이다.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그래서 참된 복음은 가장 먼저 찔림을 주는 것이다.
그 찔림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는 개개인의 선택이다.
비록 나를 찌르는 말씀이지만, 그것이 나를 살리는 말씀임을 깨닫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는 찔림의 말씀이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찔림이 싫고, 듣기 거북하고,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찔림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부분에서는 베드로가 전하는 찔림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그 찔림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던 것이고, 사도들은 회개와 세례를 말해주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의 복음을 들은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는가?
그들은 스데반의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공작을 꾸민다.
본문 11, 12절.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듣기는 싫고, 그렇다고 말로써 스데반의 지혜를 이길 수는 없고….
그렇다 보니 이들은 스데반을 모함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매수한다.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을 통해 가짜 뉴스를 퍼트리게 한 것이다.
뜬금없이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을 잘못 언급했다가는 민족의 원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권력자였던 사두개인들에게 모세는 결단코 비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동시에 모독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린 것이다.
이것으로 스데반이 모든 이들의 공적이 되도록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런 수작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대적자들은 자신들만으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깐 거짓말을 해서 권력을 가진 공회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스데반을 모함하며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본문 13, 14절.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대적자들의 거짓말은 교묘하다.
아예 없던 말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스데반이 했던 말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버린다.
앞서 밝혔듯이 당연히 구약성경 얘기하고, 메시아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 율법, 성전, 그리고 예수님 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했던 말 중에서 뺄 건 빼고, 적당히 비틀어서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킬 말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에서 이미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믿겠는가?
스데반을 향한 거짓 증언의 진실 여부를 제대로 판가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사람들은 벌써 스데반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작정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더 많은 죄를 추가로 물으려 할 뿐이다.
예수님 때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열리는 스데반의 재판은 객관성도, 도덕성도, 법치도, 정의도, 아무것도 없이 죄인들이 작당하고 있는 죄악의 자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스데반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
자칫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난을 겪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스데반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본문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너도나도 득달같이 일어나서 스데반을 고발하면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거짓 증언이 난무하고, 분노에 분노를 더 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스데반을 잡으려는 작당을 벌이고 있다.
그런 중에 공회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였다.
그 사람들은 수많은 증인들의 외침 속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더 큰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고 울부짖는 스데반을 예상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스데반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안해하며 떨어야 할 텐데, 오히려 스데반이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스데반이 이처럼 평온할 수 있는 것인가?
 
여러분….
누명을 뒤집어쓴 적이 있는가?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억울하게 징계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아니, 누군가에게 작은 오해라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는가?
그럴 때만큼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고, 미칠 것 같은 경우도 흔하지 않다.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하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누군가가 거짓말로 나를 모함해서,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한 사람의 말을 믿으며 나를 공격할 때….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개인적으로 몇 날 며칠을 힘들어한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서 애꿎은 가족에게 화풀이하기도 한다.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느끼고 결국 극복한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스데반은 모함을 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잡으려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쌓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라는 표현에 대해, 실제 스데반의 얼굴에 모세처럼 광채가 났던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고, 단지 시적이고 상징적 표현일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느 것이 맞든지, 중요한 것은 지금 공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평온한 마음으로 안정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라는 사실이다.
그 누구보다 힘들어하고 어려워해야 할 그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일까?
 
앞서서 소개한 대로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였다.
그는 성령을 분명하게 체험했고,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으로 지혜가 가득했던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죄 사함을 인정하고, 확신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충만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권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스데반은 사도들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장 11, 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스데반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지혜로 믿으며 의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넘쳐나는 은혜의 체험으로 주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믿음으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을 소망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감당해야 하는 억울한 누명,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겪어야 하는 참담한 모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가게 될 천국, 자신을 맞이하실 주님을 생각하며,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와 같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 말씀은 모함과 누명을 받을 때면 많이도 고통스러워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엉뚱한 일을 벌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공하지는 못해도 누명이나 모함은 결코 당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아주 예민하였다.
그러다가 억울함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누명을 썼을 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해야 할 일, 말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풀어버릴 정도로 자신을 지키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주님을 향한 확실한 믿음과 천국을 향한 분명한 소망이 필요한 시대임을 다시 한번 고백한다.
그 믿음과 소망으로 억울하게 모함받고 누명을 쓸 때, 그것이 예수의 이름 때문이라면, 그 고난을 기뻐하며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죽음 앞에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던 스데반을 기억하며...
고난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억울함 속에서도, 모함을 받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함께하심을 확신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바라보며….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나타내는 내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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