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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삶의 작은 일에도...(사도행전 5:7-11)

by TwoTalents 2021. 10. 17.

제목 : 삶의 작은 일에도...

 

본문 : 사도행전 5:7~11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 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말씀 :

원래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함께 묶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특별히 나눌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분리해서 나누게 되었다.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본문에 나타나는 그의 아내는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를 말하는 것이다.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공모하여 마치 자신들의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처럼 거짓말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거짓은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으로 남편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징계로 그의 혼이 육체에서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이 있고, 세 시간이 지난 후에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다시 등장한다.

본문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남편이 죽은 지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그의 아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긴 하다.

일부러 삽비라에게 알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알릴 수 없는 곳에 있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가운데 사도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그녀에게 질문한다.

만약 삽비라가 남편이 죽은 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사도들의 질문에 대해 어떤 식으로도 변형된 답변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일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대답은 그 당시 삽비라의 영적 상태, 신앙적 상태를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처음 베드로는 남편 아나니아에게 변호의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그의 거짓말을 책망했었다.

그것으로 아나니아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혼이 나가는 징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 삽비라에게는 다르다.

베드로는 땅을 판 값이 전부인지를 질문하는 것으로 삽비라가 진실을 말할 기회를 주고 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똑같은 권한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가족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가진 지위와 권한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본문인 사도행전 5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값의 얼마를 감추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아나니아이다.

부인인 삽비라는 단지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남편의 거짓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다.

남편 아나니아가 결정한 것을 아내인 삽비라는 그저 반대하지 않고 따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그렇다고 삽비라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할 경중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도 삽비라에게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목회자는 삽비라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나니아와 같은 마음으로 공모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때라도 진실을 말했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삽비라는 최악의 선택을 해 버린다.

베드로의 질문에 거짓말로 대답을 해버린 것이다.

그전에는 남편의 거짓에 대해 그저 침묵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직접 거짓을 말하고 있다.

그녀의 죄가 더욱 깊어지는 순간이다.

 

저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지금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이 평 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한다.

우둔했던 것인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 죄를 가볍게 생각한 것인지.

삽비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으로 범죄한 남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베드로는 남편의 길을 따르는 삽비라를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본문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좋게좋게 생각해서 삽비라의 거짓말을 남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줄 수도 있다.

남편이 죽은 것을 모르는 상태이고, 뭐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어쩌면 사도가 자신과 남편에게 같은 질문을 한 것이고, 서로 어떤 대답을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남편은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을 것이니, 자신도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으로 미화시키려면 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녀의 거짓말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냐는 것이다.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거짓말로 주의 영을 시험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우롱하는 행위였다.

한창 정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의 근간을 무너트릴 수 있는 심각한 범죄였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남편과 똑같은 거짓말을 했으니, 삽비라도 똑같은 징계를 받게 될 것을 전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말은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

본문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남편과 같은 거짓된 마음을 품은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의 질문을 받았을 때만 해도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결국, 욕심이 이 부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망친 것이다.

아나니아는 재물과 명성을 모두 갖고 싶어하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욕심으로 인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 거짓을 말하고 말았다.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는 그런 남편을 제재하지 않았고,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으로 거짓에 동조했던 것이다.

그나마 주어진 또 한 번에 기회에서도 하나님과 교회보다, 남편을 먼저 생각하며 거짓된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다.

끝내 두 사람 모두 거짓된 마음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징계를 받고 말았다.

 

이러한 아나나니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본문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교회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헬라어 에클레시아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점점 그 모습을 갖추어가는 시기임을 알게 해 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는 이런 과정 중에 일어난 것이기에 더욱 엄중하게 다루어진 것이다.

교회가 형성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정결함, 거룩함, 정직함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그저 무서하면서 하나님의 엄중함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드시 반면교사로 여겨서, 하나님의 앞에서의 정직함, 신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신실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 즉 교회는 언제라도 신실하기 위해서, 거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 하나님 바로 거짓을 싫어하시고, 정의를 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아나나니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전해지는가?

혹시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가?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전 재산을 바친 것처럼 거짓말을 한 적도 없기 때문에 그저 남의 일처럼 생각되는가?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이 있다.

반복적으로 전하는 내용이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의 요지는 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재물과 명예는 매개체일 뿐이고, 그 매개체를 통해 그들이 욕심을 품었으며, 그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직접적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는가?

직접적으로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을 비방하였는가?

그런 것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음이라는 최고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상대로 거짓을 진실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말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것은 이들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마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그 범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것을 본다.

감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감동을 은혜와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감동이 크면 은혜도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큰 감동을 주기 위해 무리를 한다.

있던 사실을 부풀린 다거나,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없던 일을 사실에 첨가해서 변질시키기도 한다.

이런 행위는 설교, 간증, 기도회, 성경공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감동을 크게 하면, 거기에 따른 은혜도 크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니 없던 일도 아니고, 사실을 조금만 바꾸면 많은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고, 은혜도 많이 받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에 오게 하면 되고, 교회 오고 난 후에 잘 교육하면 되는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생각이 바로 사탄에 의한 달콤한 유혹이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발생한 잘못된 예화가 너무나 많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설교 시간에 전하는 많은 예화 들이 사실 여부도, 근거도, 원작자도 불분명한 것들이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설교 듣는 사람들을 감동만 시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동과 은혜는 같은 것이 아니다.

감동은 크지만, 은혜와 전혀 상관없을 수 있다.

반대로 감동은 적더라도 큰 은혜의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은혜는 마음의 찔림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은 감동을 전하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은혜를 끼친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뻐하며 감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115, 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시편 151, 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이사야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누가복음 1245, 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거룩하고, 진실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진실함으로 따라야 한다.

주님의 길을 진실하게 따라갈 때, 결국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말씀 마무리...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 없던 것을 덧붙이는 말들은 모두 거짓일 뿐이다.

결코,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진실이 아닌 것으로 맺어진 열매는 온전한 열매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열매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다.

 

우리는 한 성도의 삶과 어느 교회를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규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건물과 규모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 다음으로 2등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에서 그들은 사탄이 마음에 가득한 자들이었고, 주의 영을 시험하는 자들이었다.

진실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칭찬이 아닌 죽음이라는 징계였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의미 없이 꾸며진 감동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며, 진실을 원하신다.

삶의 작은 일에도 주님을 닮아서 진리로,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이길, 정직한 사람이교회 공동체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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