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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나눔의 이유.(사도행전 4:36-5:6)

by TwoTalents 2021. 10. 12.

제목 : 나눔의 이유.

 

본문 : 사도행전 4:36~5:6

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 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말씀 :

오늘 말씀의 본문은 사도행전 4장의 마지막 부분과 5장의 첫 부분이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성립된 후, 그 교회가 계속해서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시기이다.

 

사도행전 243절에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일회성이 아니고 지속적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 이유를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 때문이라고 밝힌다.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들의 기사와 표적으로 인해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

수사법상, 이 두려움은 존경심과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눔의 이유가 조금 다르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들의 큰 권능으로 인한 것은 사도행전 2장과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달랐다.

2장에서는 사도들을 향한 존경심이나 경외심이었다.

그런데 4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큰 은혜를 받으므로 말미암은 것이다.

저는 이 부분을 교회의 신앙이 한 단계 성숙한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큰 은혜를 받고, 자발적으로 서로 물건을 통용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34, 3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자신이 가진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 앞에 내어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 재산을 다 내어놓았다는 말이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그것이 필요한 각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 공동체 속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내어놓았다.

이 모든 것은 큰 은혜로 말미암아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체험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을 나누는 믿음의 행동인 것이다.

절대로 강제성이 동원된 행동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 하나를 소개한다.

본문 436, 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레위 족속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아주 모범적으로 나눔의 삶을 살았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 불렀다.

바나바는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

그가 참으로 나눔에 대한 모범적인 삶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렀던 것.

이 사람, 바나바의 이런 삶은 결코 가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나눔은 진실함에 있었고, 이런 그의 삶은 변함없이 꾸준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1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안디옥교회를 거점으로 이방을 향한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 시작되면서, 바울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처음으로 파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바울과 함께 파송된 그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불리는 바나바이다.

이 사실은 그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칭찬받고, 변함없이 신뢰를 얻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나바가 사도들 앞에 자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내어놓은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잘난 체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의 칭찬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나바를 신뢰했고, 결국 그에게 이방 선교라는 중책을 맡기게 된 것이다.

처음에 바울과 함께 전도를 시작할 때는 바울보다도 바나바의 이름이 항상 먼저 등장했다.

바나바와 바울이었다.

이것은 교회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는 반증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51절부터는 바나바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한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그들이 이름은 아나니아삽비라이다.

이들도 바나바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통용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문 51, 2.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다.

그런데 얼마를 감추어 두고 나머지를 내어놓는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은 얼마를 그냥 남겨두었던 것이 아니다.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밀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은밀히 행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형제, 자매를 돕겠다는데 재산의 일부를 비밀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은밀하게 숨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거기에 거짓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이다.

아나니아는 앞서 말한 바나바나, 다른 여러 사람들처럼 자신도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교회에 바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나바처럼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고 하니,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치는 것은 좀 아까웠던 것이다.

그는 명예에 대한 욕심과 재물에 대한 욕심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결국 자신의 재물의 얼마를 사람들 몰래 숨겨 놓는다.

그래 놓고선 전 재산을 다 바치는 것처럼 거짓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나니아의 거짓된 행동을 그의 아내인 삽비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행동은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행동을 사람은 물론 성령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본문 53, 4.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그 값으로 서로 나누었던 것은 순수하고 자발적이었다.

그리고 그 자발적인 행동의 원인은 부활의 증거를 듣고 깨달은 은혜였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그들이 스스로 행한 선행이었다.

그러니깐 결국 그들의 나눔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그 보답함에 거짓을 행한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 행동을 한 것이다.

원래 땅 주인도 아나니아였고, 땅을 판 뒤에 그 값도 아나니아의 것인다.

그럼에도 자기 것을 받은 은혜대로,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곧 아나니아는 재물의 주인이 아닌,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재물의 노예가 된 그 마음을 그대로 두었음을 베드로는 강력하게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나니아의 잘못된 생각, 잘못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함에서 자신을 건져내지 못하였다.

본문 55, 6.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혼이 떠났다는 말은 그가 죽었다는 말이다.

아나니아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직접 징계를 하신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자신이 사도들을 속인 것에 대해 바로 들키게 되자,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아나니아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거짓말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서운 형벌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 다음 내용을 보면 아나니아의 거짓을 묵인했던 그의 아내 삽비라, 삽비라 역시 끝내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나눔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 번째는 동기의 순수성이다.

나눔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수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다른 목적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참된 나눔일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으실 일이다.

두 번째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모든 일에 거짓이 없어야 하겠지만, 특별히 나눔에는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거짓은 동기의 순수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마저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

나눔은 진실함으로 해야 한다.

세 번째로 나눔에는 아낌이 없어야 한다.

이 말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다.

나의 가진 것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나누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무조건 모든 재산을 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다.

적어도 자신이 처음 얼마를 나누겠다고, 마음먹고 기도함으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마음 먹은 부분에서는 아낌없이, 주저 말고 기쁨으로 나누어야 한다.

아나니아는 전 재산을 다 줄 것을 어설프게 마음먹고는, 아까워하고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나눔을 위한 이 모든 조건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아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을 향한 긍휼함만으로는 나의 것을 내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그의 고난,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 천국에 대한 약속과 하늘나라로의 승천에 대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을 알게 되고, 천국을 소망할 때, 우리는 순수한 나눔, 거짓 없는 나눔,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저 헌금하고, 봉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을 행하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가 정말로 중요하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느끼고 감동한 우리이기를 소원한다.

그 은혜로, 우리 안에 샘솟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자발적인 나눔과 자발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봉사로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많은 것을 나누려 하지 말고, 하나를 나누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누는, 참된 나눔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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