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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4 복음, 땅 끝을 향하여-사도행전(I)

성령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사도행전 2:5~13)

by TwoTalents 2021. 8. 3.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성령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

 

본문 : 사도행전 2:5~13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 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말씀 :

오늘은 성령의 역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자신을 대신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믿고,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그런데 그 모습, 성령이 임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환상적이면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120명의 성도가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이날 모인 120명의 성도에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전에는 도저히 체험해보지 못한, 아니 생각지도 못한 성령의 능력이었다.

성령의 힘을 입어, 배우지도 않았던 말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들의 마음이 어떨 것 같은가?

흥분의 도가니, 영적 축제의 분위기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가 이다지도 강력한 것이라고는 그곳에 모인 120명의 성도 중에 누구 하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령의 임재의 영향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가의 다락방, 그곳에 모여 있는 120명의 성도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 성령의 임재, 성령 충만의 영향력은 마가의 다락방을 뛰어넘어, 그 좁은 다락방 밖을 향해 퍼져나갔던 것이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가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로 시작된 성령의 역사하심이 세상을 향하게 되고, 그 첫 번째로 이루어진 역사가 오늘 말씀의 내용이다.

 

120명의 성도는 성령의 임재를 직접 체험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을 때, 그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120명의 성도에게 임하신 성령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을 체험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경우가 발생했다.

마가 다락방, 120명의 성도를 향한 반응이 확연히 다르게 두 부류로 나눠진 것이다.

오늘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임하신 성령을 내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 역시 주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성령이 임재하시는 그 자리에 내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 말씀을 나누었으면 한다.

 

먼저, 방언에 관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강력한 성령의 임재로 인해 발생한 변화는 바로 성도들이 방언으로, 그러니깐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위의 사람들은 120명의 성도가 방언하는 모습에 놀라워하며, 그것으로 성령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방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몇 번 언급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에는 크게 2가지 종류가 있다.

오늘 본문에 임하신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언급한 고린도 방언이 그것이다.

이 방언에 이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단지 오순절 일어났던 방언이기 때문에 오순절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고린도 방언이다.

어쨌든 두 방언을 성경은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방언의 성격을 살려볼 만한 구절은 사도행전 24절과 고린도전서 142, 14절 정도이다.

물론 다른 구절들에서도 방언을 언급하는 곳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방언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는 방금 말씀드린 두 구절이 가장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4절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42절 말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J. 오스왈드 샌더스라는 신학자가 방금 말씀드린 성경 구절과 다른 구절들을 참고하여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 방언을 이렇게 비교해 놓았다.

오순절에는 모두, 그러니깐 저희가 다 방언을 말했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각기 여러 나라말로 말했기 때문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오순절의 방언은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깐 그 나라 말을 알아듣는, 그 나라 사람을 향해 전파되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하나님만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방언은 통역자가 필요치 않았지만, 고린도 교회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필요했다.

바울은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샌더슨은 더 많은 차이점을 말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차이점이 이런 것이다.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 방언은 성령의 임재로 인한 현상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은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도 이 두 방언에 대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의 방언은 헬라어로 디알렉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민족의 언어이다.

거의 모든 영어 성경에는 ‘Language’, ‘언어라고 번역되어 있다.

반면에 고린도 14장의 방언은 헬라어로 글로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영어 성경에는 주로 ‘Tongue’라고 번역하며 혀, , 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배울 수 없는 언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깐 성령의 역사가 혀에, 입에 임해서 어떤 신령한 말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저는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 방언을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도 오순절 날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두 사건을 동일시하고, 한 교리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작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순절 날에 있었던 방언은 명백하게 거기 모인 사람들의 본국 말이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배우지 아니한 생소한 언어로 말을 했던 것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적어도 열 개 이상의 각기 다른 방언을 사용하던 사람들이었고, 각기 자기 지방의 말을 알아듣고는 놀라움을 표시했던 것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그 날, 성령이 처음 임하시던 그 날을 제외하고는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재현되지 않았다.

절대로 오순절 방언과 같은 성령의 역사는 없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드러난 교회사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방언은 이제 끊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오순절 방언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방언, 오늘날에 은사로 받았다고 말하는 방언은 오순절 방언이 아닌 고린도 방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각기 다른 언어, 그 방언이 아니다.

그러니깐 오늘 본문의 상황은 랄랄라’, ‘룰룰루방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면 영어, 독일어면 독일어, 불어면 불어와 같은 말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다.

본문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그 때에’, 즉 성령이 마가 다락방에 임재하여 120명의 성도가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그때를 말한다.

이날은 유대 3대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었다.

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경건한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자들이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본문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이 소리22절에 나타난 성령의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해석하시는 신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120명이 함께 내는 방언, 각 나라 언어로 말하는 소리라고 이해한다.

동네 중간의 어느 다락방에서 120명의 사람이 함께 큰소리를 내므로 그 소리는 밖에까지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는 한 언어가 아닌 각 나라의 언어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라고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본문 7절과 8.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아니 저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인데.

갈릴리는 촌 동네이고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울 리가 없는데.

갈릴리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우리가 다 업신여기는 곳인데.

어떻게 그 갈릴리 사람들에 입에서 우리 고향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의 상황에서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인 것이다.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놀랐는지 9절부터 11절 상반 절에서 좀 더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

본문 9절에서 11.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본문에는 15개 지역의 이름을 열거되어 있다.

그러니깐 이 사람들은 이 15개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인 것이다.

이 말은 제자들이 적어도 15개 이상의 언어들로 말하였다는 것이 된다.

기껏해야 갈릴리 사투리인 아람어나 본토의 히브리어 정도밖에 하지 못하던 시골 사람들이 갑자기 15개 이상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을 했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구사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결단코 아니다.

그것도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금 이 오순절 방언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하심이 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천국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역사의 첫 준비 단계로 마가 다락방 120명의 성도가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로 이들은 좀 더 주안에서 훈련을 받은 뒤, 세계를 향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복음은 세상 끝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마가 다락방 120명의 성도는 각자가 받은 언어로 하나님의 일을 이야기했다.

본문 11절 하반절.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여기서 우리는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이 속한 지역의 방언, 언어로 그들이 들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들었는가?

바로 하나님의 큰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큰일을이란 부분을 헬라어 성경에는 타 메갈레이아 투데우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승천 같은 특별하고 특정한 사실에 대해 말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 큰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전 사역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스스로도 하나님의 큰일을 깨닫게 되었고, 그 큰일을 자랑하며 감사하고 찬양했던 것이다.

성령의 엄청난 역사이다.

 

이 놀라운 역사를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목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목격하던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그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고 놀라워하는 것이다.

본문 11절 하반절과 12.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20명의 성도가 각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일을 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있다고 그것을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일이 선포 되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놀라며 당황해하고, 서로서로 이야기하면서 이 현상에 관해 토론한다.

말 그대로 충격을 먹은 것이다.

본인들에게 직접 오순절 방언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눈앞에서 일어난 이 기이한 사건을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임재로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 뒤인 14절부터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설교가 등장한다.

베드로가 설교를 다 마친 후의 상황을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사람들이 120명의 성도들의 놀라운 언어 역사를 목격한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 천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 본문에서 하나님의 큰일을 인정한 사람들, 그 일을 보며 놀라워했던 사람들, 이들이 분명, 이 삼천의 사람 중에 속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면, 하나님의 큰일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제자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조롱하고 비난한다.

본문 마지막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똑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봤지만, 본문의 어떤 이들은 오히려 제자들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 술에 취했다고 단정 지어버린다.

술에 취해서 술주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제가 방언에 대해 세세히 몰랐을 때, 그러니깐 고린도식 방언의 개념만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이 13절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조롱이 오히려 이해가 됐다.

저도 중학교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는 이상했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영락없이 술에 취해서 주정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오순절 방언에서는 그게 아니다.

랄랄라’, ‘룰룰루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곳에 모여들었던 그 사람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제자들을 조롱했던 이들은 방언하는 모습을 보며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20명 성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큰일, 그 내용을 듣고 조롱하며 술 취한 헛소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120명 성도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비웃으며 하찮게 여겼던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자신들의 두 눈으로 보고, 천국의 복음을 두 귀로 들었음에도, 결단코 성령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조롱하는 이 어떤 이들이었던 것이다.

 

제가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것 중의 하나는 확실한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것이다.

어정쩡하게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람의 기대감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임재가 확실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간구한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이왕 방언을 받을 거면, 고린도 방언이 아닌 오순절 방언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기도드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성령의 임재가 확실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기에 바쁜 무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임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성령의 임재를 바르게 분별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깨어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확실한 성령의 임재가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의 임재를 정확하게 느끼고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 임재의 역사를 인정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든지, 아니면 내 옆에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에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목격하든지 간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주님 안에서 인정하고 놀라워하며, 기쁨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하나 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와 함께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에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그 형제, 자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형제, 자매와 함께하는 신앙공동체와 나에게 임하는 동일한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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