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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갈라디아서 6:11~18)

by TwoTalents 2020.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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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본문 : 갈라디아서 6:11~18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말씀 :
오늘로 갈라디아서가 마무리된다.
본문에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귀한 주님의 말씀이 깨달아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에서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바울은 앞부분과는 달리 이 부분만은 직접 친필로 기록하게 있다.
본문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보통 편지를 직접 쓰지 않았다.
자신이 불러주는 것을 필경사가 대필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인사 부분이나 중요한 부분에서는 친필로 작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그 부분은 직접 기록한 것임을 밝힌다.
갈라디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문 이전까지는 바울이 말하는 것을 다른 이로 하여금 받아 적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본문에 와서 바울이 직접 친필로 편지를 기록한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큰 글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힌다.
본인이 직접 기록한 것도 그렇지만, 특히 큰 글자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 편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편지의 앞부분 내용에 대해 바울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나타내는 모습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문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억지로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단 종파이다.
유대교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기독교가 이단이어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교는 정당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에게도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이들이 이런 박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들이 싫어하는데, 바울과 같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해 할례도 행하지 않고 그들을 형제, 자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핍박할 거리를 더 제공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핍박을 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할례나 절기와 같은 율법의 요소들을 지킴으로써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그토록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영적인 이유도, 신앙적인 이유도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자신들이 유대교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는 것을 면하고 싶고, 더 나아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그 안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율법을 강조하는 이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다.
앞서서 간접적으로 이 부분을 말하던 바울은 이제 직접적으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임을 밝힌다.
본문 13절.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자기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
기껏 눈에 보이고 잘 드러나는 할례와 절기만을 간신히 지킬 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는 분명히 좋지 못한 목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들은 할례의 우월함을 강조함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있다.
날 때부터 유대인으로 난지 8일 만에 할례받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죽기까지 겸손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이런 자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본문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이력들, 소위 세상적 스펙이라는 것을 배설물로 여긴 바울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더 이상 세상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니깐 실제로 그런 스펙 따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원래 좋은 것인데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래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아주 중요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똥으로 여긴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바울은 진실로 중요한 것, 자신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유대교의 눈치나 보고 있고, 율법에 사로잡혀 할례받는 것을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신에 대해 못 박았고, 자신도 세상에 대해 못 박았다고 고백한다.
이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이 세상과 철저하게 등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기도만 하며 살 거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세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그런 세상적 가치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지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만이 인생의 참된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할례의 행함이 얼마나 불필요한 논쟁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본문 15절.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좋고, 나쁘고 따질 것도 없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무의미한 논쟁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이 무언인지를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도 말하고 거듭났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기 위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본문 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 ‘이 규례’는 무엇인가?
형식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인가?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바울은 형식뿐인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판하고 있다.

본문의 ‘이 규례’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이 계속해서 주장해 온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의 일부분, 그러니깐 할례와 절기만을 강조하는 어설픈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들을 향해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자기들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전하였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율법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 본질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본질은 사랑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도 없이 그저 주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떠드는 믿음이 아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 사랑이 드러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참된 평강과 긍휼이 임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논쟁이 갈라디아 교회에 반복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본문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제부터는 제발 할례와 같이 쓸데없는 것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편지를 제대로 읽고, 성령으로 깨달아 정신 차리고, 육체로 돌아 가버린 것을 다시 성령으로 채우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 말의 권위를 자신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으로 나타내려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흔적’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성흔’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성흔’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해석은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얻게 된 몸의 상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바울은 핍박을 받았을 것이고, 그런 과정 중에 육체적 고통을 당하며 바울의 몸에는 상처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은 보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정확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말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흔적이 바울에게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전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모두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해 은혜가 임할 것을 기원하며 편지를 마치게 된다.
본문 18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여느 때처럼 마지막 인사를 하지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개인을 향한 안부는 생략하고 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여전하지만, 지금 이 편지의 심각성과 엄중함을 나타내고자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여,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시작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위한 편지이다.
그렇게 성령으로 시작했던 갈라디아 성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할례와 절기에 관한 주장을 듣고 흔들렸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흔들렸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 자체가 흔들렸다는 말이다.
믿음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하고, 엄밀히 말해서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유대 절기를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이 분노하는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결코 율법 자체를 무시했던 사람이 아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도 모른 채 그저 모양만을 따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율법을 지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도 없으면서 오직 믿음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 한대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 사랑이 드러나는 믿음,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붙잡힌 바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삶인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공동체 여러분….
이제까지 나누어본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참된 믿음에 관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주여 한다고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교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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