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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갈라디아서 5:16~21)

by TwoTalents 2020. 8. 23.

이미지 출처 - www.waychurch.me

제목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

 

본문 : 갈라디아서 5:16~21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 :

바울은 앞서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말하였다.

죄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율법에 속한 삶과 믿음에 속한 삶을 육체의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비교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으로 돌아가서 자유를 포기하려는 삶을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는 삶으로 정의한다.

반면 그들이 회복해야 할 믿음의 삶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고 전한다.

 

먼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함을 가르친다.

본문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의 이 말에는 믿는 자들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전한다.

본문의 행하라는 헬라어로 페리파테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걷다’, ‘두루 다니다이다.

그러니깐 믿는 자들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 위해서는 한발 한발 내딛는 매 순간을 성령과 동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걸음이라도 방심하였다가는 욕심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르는 것으로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과 육체는 서로 대적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본문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함께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내가 육체의 소욕을 품고 있다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다면, 육체의 소욕을 품을 수 없다.

내가 육체의 소욕을 더 크게 품고 있다면, 이것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성령을 방해하는 것이다.

내가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긍정적인 모습으로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본문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율법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령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는 원래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있다고 나누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며 사는 삶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이제는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율법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울은 이 믿음의 삶을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으로 율법의 원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 편협한 생각으로 할례나 절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킨다고 육체의 욕구를 피할 수는 없다.

오직 성령에 따라 살아야만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밝힌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이다.

 

그런데 바울은 의도적으로 육체의 욕심과 율법 아래 있는 삶을 같이 말하고 있다.

서두에서 말 한대로 이 둘은 같은 맥락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의 삶이 바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할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를 차별하면서 할례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에 속한 것처럼 주장한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주장에 미혹되어서 할례를 받으려 하고 절기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진짜 유대인이 되고 싶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나열한다.

본문 19~21절 상반절.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본문의 나열된 육체의 일은 똑같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것들이 육체의 일이고, 성령의 방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울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의 분명하니는 헬라어 화네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분명한’, ‘공개적으로’, ‘표면적으로 나타난’, ‘드러난등의 뜻을 가진다.

그러니깐 분명하게 공개되어 모두에게 드러난,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숨겨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성령의 일인지 육체의 일인지 애매한 것이 결코 아니다.

육체의 일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분명하게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 그런 행위이다.

 

본문의 음행은 헬라어로 포르네이아라는 단어이다.

오늘날 포르노와 어원을 같이 하는 단어이다.

이는 매음, 간음, 근친상간을 포함한 모든 음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음행이 나쁜 행동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가?

다 알고 있다.

더러운 것은 헬라어로 아카다르시아라는 단어로 불순한 성질,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불결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도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불결하고 불순한 것이 나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어서 나열된 모든 육체의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애매한 것이 아니다.

확실하게 잘못된 행동, 나쁜 일이라고 모두가 잘 아는 것들이다.

그런데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아는 나쁜 일, 잘못된 일, 육체의 일인데 이것을 왜 멈추지 못하는가?

그것이 바로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대적인 육체의 소욕에 지배되어 욕심대로 살다 보니 분명하게 드러난 잘못을 그대로 행하며 사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이 아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을 향해 경고한다.

본문 21절 하반절.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의 이런 경고가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삶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다.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말은 천국 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천국 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여도, 그 삶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이 드러나지 않고, 그저 육체의 일, 욕심을 따르는 삶만이 드러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지금 바울이 선한 행위가 구원받은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결과여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따르는 행위가 없는 것으로 애초에 회개도 믿음도 가짜였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분명히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율법을 좇는 것으로 육체로 끝나게 될 판이라고 경고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가진 구원관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구원을 과거지향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현재진행형이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구원은 과거의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시작하여 지금도 그 여정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구원의 결과가 아니라, 구원의 여정에서 요구되는 믿음의 삶인 것이다.

예수님을 진짜로 믿어서,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시작한 이들은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구원의 여정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바울은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선언한다.

육체의 욕심과 성령을 따르는 삶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어느 하나가 내 삶에서 드러나면 나머지 하나는 사라지게 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삶이어서는 안됨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육체의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끊어 버려야 함을 가르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구원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이 말 한대로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끝나버리는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시작한 우리의 삶을 성령으로 이어나가고, 결국은 성령으로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성령께 맡겨야 한다.

내가 육체의 일을 도모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육체의 일은 우리가 모르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들이다.

그것이 육체의 일임을 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몰랐다는 비겁한 핑계는 통하지 않는 이유이다.

욕심 때문이다.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욕이 알고도 육체의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욕, 육체의 일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매 순간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내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님의 말씀이 내 하루의 시작이고, 주님의 말씀이 내 하루의 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삶이 성령의 이끌리는 삶으로 풍성해져서 육체의 소욕이 드러날 틈이 있을 수 없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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