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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나쁜 사람들.(갈라디아서 5:7~12)

by TwoTalents 2020. 8. 10.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나쁜 사람들.

 

본문 : 갈라디아서 5:7~12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말씀 :

오늘 본문인 37~12절까지 말씀은 지난 본문인 1~6절까지의 말씀과 연속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다른 부분은 1~6절까지가 갈라디아 성도들을 꾸중하였다면, 오늘 본문은 7~12절까지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미혹한 거짓 교사들을 질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상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주. 반달레이 데 리마 선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브라질의 반달레이 데 리마라는 선수가 1시간 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결승선을 6Km 정도 남겨 놓은 상태에서 계속 1위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자가 마라톤 코스로 난입한다.

그 사람은 리마 선수를 붙잡고는 마라톤 코스 밖으로 밀쳐 내 버린다.

다행히 다른 관중들과 안전 요원의 도움으로 리마는 다시 코스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 리마 선수가 다리에 고통을 호소하면서 뛰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넘어졌던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으로 이미 페이스가 엉켜버리게 된 것이다.

밸런스가 중요한 마라톤에서 리마 선수는 지금까지 유지해 온 밸런스가 깨지고 말았다.

결국, 뒤따라오던 2명의 선수에게 추월당하게 되고, 최종 순위 3위로 결승점을 통과한다.

 

난입했던 남자는 아일랜드 출신의 코넬리우스 호런이라는 사람으로 시한부 종말론자였다고 한다.

종말에 관한 자신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난입하는 일을 벌였다고 한다.

혹시나 그 사람의 메시지가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꿈을 짓밟으며 전달하는 메시지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결코 정당할 수 없다.

거기다가 이 사람은 나중 인터뷰를 통해 자기 덕분에 리마 선수가 더 유명해졌다는 말까지 하게 된다.

리마 선수는 이상한 사람의 방해로 인해 3위를 했음에도 기쁘게 결승점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난입한 그 사람을 용서한다는 인터뷰까지 하였다.

이후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마지막 성화봉송 주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리마 선수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방해한 사람을 용서한 것은 감동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일을 실제로 겪게 된다면 너무나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너무나 잘 달렸는데,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단지 방해한 그 사람의 잘못된 목적을 위해서.

아무런 관계없는 내가 손해 보고,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은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임이 분명하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런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씀이다.

본문 1.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바울은 믿음 생활을 달리기 경주에 자주 비유하였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서도 지금까지 잘 달려왔다고 전한다.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의 경주를 멋있게 치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며, 삶으로 그 믿음을 증거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에 의해서 잘 달리던 믿음의 경주에 방해를 받게 된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이 더 이상 앞으로 달려가지 못하도록 아예 길을 막아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한 탄식을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대체 잘 달리던 너희를 막고 방해하는 이가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바울도, 그리고 이 질문을 받는 갈라디아 성도들도 이 방해자가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방해는 말 그대로 방해일 뿐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전한다.

본문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본문의 권면은 헬라어로 페이스모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설득’, 혹은 꼬임이다.

그러니깐 부드럽게 타이르는 권면보다는 공격적으로 미혹하는 설득이나 꼬임이 훨씬 더 타당한 번역이 된다.

미혹하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의 믿음의 길을 가로막고는 다른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제시한 그 길이 결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왜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닌가?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아들을, 독생자를 믿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할례나 절기를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서도 하신 적이 없다.

 

이렇게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교사임에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본문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빵에 들어가는 누룩은 소량이다.

하지만 빵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율법주의, 형식주의를 전하는 가짜 교사들이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들의 가르침에 빠지는 이들도 소수였다.

하지만 거짓 가르침의 전염성은 너무나도 위험한 요소이다.

그것은 교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바울은 미혹된 자와 미혹시키는 자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본문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성도들 중에 몇몇은 이미 율법주의에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게 될 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처럼 말하는 것은 미혹된 자들이 다시 성령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격려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 아들, 우리 딸은 다시 잘 판단하고 올바른 길을 갈 것이라고 믿어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못한 나의 자녀가 다시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자녀를 향한 믿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바울의 심정이 이런 것이다.

 

하지만 갈라디아 성도들을 율법주의로 미혹시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심판을 전한다.

그들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바울은 믿음의 경주를 잘하고 있던 갈라디아 성도들을 방해하고, 전혀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로 본 것이 분명하다.

마가복음 328, 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심,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다.

바울은 율법을 행하여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바울의 복음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형식주의자들의 그 주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것, 곧 성령을 모독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오직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참된 복음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음을 전한다.

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바울을 향한 박해는 크게 두 무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로마이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의 입장에서 다른 신을 참신이라고 전하는 바울은 이단자이며, 로마를 적대시하는 반정부주의자이다.

그러니 그들이 바울을 핍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두 번째는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유대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바울의 모습이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바울은 가짜라고, 그는 정식 사도가 아니라고, 그는 과거에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공격했던 것이다.

만약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와 절기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쳤다면, 적어도 그들에게서 받는 핍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바울이 할례와 절기를 전하게 된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원래 복음이 왜곡되어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바울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은 사라지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걸림이 되는 십자가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편하자고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울은 자신의 평안과 안녕보다는 참된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본문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가장 단호한 모습이다.

지금 바울은 진리도 아닌 할례를 가지고 거짓 선동을 하는 가짜들에게 그냥 성기를 잘라 버리라고 분노의 악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그렇게 좋으면 껍질만 자를 것이 아니라, 그냥 다 잘라 버리라는 말이다.

바울은 할례가 율법주의자들을 죄악으로 몰아가는 심각한 문제점이라고 본 것이다.

마태복음 529, 3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에 던져질 정도로 심각한 죄를 범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비록 자기 신체의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끊어내는 것이 그나마 천국에 임할 수 있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지금 이런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서두에서 오늘 말씀은 지난 말씀의 연결 선상에 있다고 전하였다.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형식, 즉 할례의 위험성을 나누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형식을 따르는 것,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따르는 것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낳게 될 것이라고 전하였다.

오늘 말씀은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성령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믿음과 율법, 두 가지를 같이 취할 수는 없다.

하나가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면, 다른 하나는 구원과 상관없는 길이다.

그렇다면, 아닌 것은 과감하게 단절하고 구원에 이르는 참된 길만을 추구하여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 천국을 향하는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바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다시 한번 주님 안에서 결단하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믿음이냐 형식이냐?

믿음이냐 율법이냐?

언제, 어느 때라도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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