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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할례(형식)의 위험성.(갈라디아서 5:1~6)

by TwoTalents 2020. 8. 2.

이미지 출처 - Daum 블로그 '복음과 믿음'

 

 

제목 : 할례(형식)의 위험성.

 

본문 : 갈라디아서 5:1~6

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말씀 :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에 매개의 역할을 한 것은 할례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지금까지 할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문제 삼지는 않았다.

본문에 들어서야 실제적으로 할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 아래 사는 삶의 방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신학적으로 논증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서는 할례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믿음, 성령의 삶을 제시하게 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바울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할례를 마치, 의에 이르는 최종 방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형식에 의해 할례를 받는 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임을 경고한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증거한다.

본문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의 의미가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는 그 어떤 종의 멍에도 멜 필요가 없다.

온전히 주님을 향한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겠다는 것, 굳이 율법의 종이 되겠다는 것은 이런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된다.

믿음으로 은혜를 주셨는데, 자신이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 의에 이르려고 하니 주님의 은혜는 인정하지 않는 꼴이 되버리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 아래로 들어가려는 것에 매개가 되었던 할례를 직접 언급한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경고가 할례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할례를 받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끼칠 유익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으로 의를 이루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유익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만다.

자신의 노력인 것이지,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지 할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할례를 받는 것은 스스로가 율법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러야 한다.

? 율법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율법을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율법이 할례 하나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할례뿐만 아니라, 수많은 율법이 있다.

할례는 물론이거니와 기록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율법을 주장했던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율법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할례와 절기만을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할례와 절기의 참된 의미를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행위적으로 그것을 지키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애초에 의에 이르는 방법으로 율법을 제시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는데.

자신들이 제시한 그 율법에 대해서도 바르게 전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따르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한다.

본문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될 뿐임을 말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으로 의를 이루기 위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율법 지키려다가 그리스도와 끊어지게 될 뿐이다.

두 번째는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율법을 강조하는 이들은 특정 율법만을 강조했었다.

즉 할례와 절기를 강조했고, 특히 할례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였다.

이런 그들의 주장 자체가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 23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것만을 지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이다.

율법을 지킬 것이면,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다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3절에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자기들 편의에 따라 왜곡시킨 율법은 그것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할 뿐이다.

이렇게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겠다는,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는 그들의 시도를 바라보며 바울은 참으로 답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오직 믿음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본문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야 의를 이루는 소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구원의 표식으로 여겼다.

하지만 참된 구원의 표식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성령이다.

할례는 실제 믿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짜 믿음을 생산하는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성령은 그렇지 않다.

성령은 믿음 없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은 그의 삶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성령의 여부를 알고 있다.

성령을 받은 자의 삶과 그렇지 못한 자의 삶에 대해서는 성령을 체험한 자라면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니깐 성령이 구원의 표식이라면 성령의 함께하심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게 되고 자신의 믿음은 사랑으로 실천될 것이다.

하지만, 할례가 구원의 표식이 되어버리면, 실제 삶에서의 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 나는 할례를 받았으니깐.

육체에 구원의 표식이 있으니깐.

굳이 힘들게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며 살 필요가 없다.

 

바울이 이토록 할례를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바울은 할례를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할례든, 무할례든 그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할례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본문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 자체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고 싶다면 받아도 상관없다.

만약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구원을 얻어서,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자.

그런 그가 단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자기도 할례를 받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할례를 받은 것이라면, 그리고 할례를 받은 뒤에도 신실한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할례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할례를 받으므로 그전에 가지고 있었던 믿음,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할례를 받는 것 자체에 무슨 신앙적 독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할례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포기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할례가 구원의 표식이고, 할례를 받으므로 온전히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어버리니깐.

이후의 삶에서는 믿음의 삶이, 사랑하는 삶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할례를 구원의 표식으로 생각해 버렸다.

그렇게 되니깐 이전에 보였던 믿음의 실천도 없고, 형제, 자매를 향한 사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바울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끝나버리고 있다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믿는 자들에게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야 하고.

나의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아끼는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 사랑이 드러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이 나를 의에 이르게 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고, 구원을 완성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할례가 참믿음을 방해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할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애써 얻게 된 믿음으로의 구원을 다시 내팽개치도록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교회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전통들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배의 형식은 오랜 기간을 거쳐 가장 합리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 정착된 것이다.

각 교단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도 그 교단의 역사 속에서 올바른 신앙을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가장 좋은 모습의 집합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전통이 절대시 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교단법이 마치 성경처럼 되는 순간 믿음이 삐걱대는 것이다.

예배는 무조건 이런 이런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서 그 예배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 전통의 참된 의미는 사라지고, 가시적인 형식만이 남게 되면, 순수한 믿음마저도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저는 얼마간의 시간동안 구세군에서 목회자 생활을 했었다.

구세군은 다른 교단과 다른 부분이 많이 있다.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군복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침례나 세례를 행하지 않고, 병사 입대를 집례한다.

그렇게 하는 것에는 구세군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교단 이름처럼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구세군이 세상을 직접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복을 입는 것이다.

언제라도 영적 전투에 임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도전을 피하지 않고, 당장이라도 주님의 말씀으로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결단도 침례나 세례가 아닌 병사 입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의미는 접어두고, 군복을 입는 것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군복을 입지 않으면 구세군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무조건 군복을 입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기가 비싼 군복을 사줄 것도 아니면서 구세군은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둥, 군복을 입지 않으니 은혜가 안된다는 둥.

군복의 참된 의미도 모른 채,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의 군복이 우스운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형식과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엉뚱한 것에 힘을 쏟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진실로 중요한 것, 우리의 생명과 관련된 것,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에 온 맘과 정성을 다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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