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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하갈과 사라를 해석하다.(갈라디아서 4:21~31)

by TwoTalents 2020. 7. 28.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하갈과 사라를 해석하다.

 

본문 : 갈라디아서 4:21~31

21.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말씀 :

앞부분에서 바울은 율법에 빠진 갈라디아 성도들을 직접적으로 질책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직접 꾸중하는 것은 잠시 멈추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율법과 은혜, 율법과 약속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선택한 인물이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이다.

갈라디아서를 읽다가 보면 이 부분이 상당히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에는 지금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율법이나 은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런데 바울이 이 부분을 알레고리 적 해석으로 접근한 것이다.

알레고리는 쉽고 간단하게 표현해서 비유, 상징적 해석을 말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개미와 베짱이이야기를 통해 직접 언급된 주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만으로 사람들은 어떠한 결론을 돌출하는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는 내용 안에 성실해야 한다는 결론을 노골적으로 내리지 않았다고 하자.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성실한 개미는 행복하고, 게을렀던 베짱이는 개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되는 모습이 되어버린다.

이런 것을 통해 지금 성실해야 나중이 편하다는 결론을 돌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레고리 적인 해석이다.

 

이런 알레고리 적 해석은 헬라 문화의 갈라디아 독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구약은 율법주의자들의 무기였고, 당시 성도들의 주된 교재였다.

그러니깐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익숙한 알레고리 적인 방법으로 율법주의자들이 신봉하는 구약성경을 해석함으로 자신이 가르치는 자유와 믿음의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먼저 바울은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자꾸만 율법, 율법 하는데, 율법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자는 말이다.

그러면서 구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을 이야기한다.

본문 22, 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그들 각각의 어머니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말한다.

이 두 명의 어머니는 당연히 하갈과 사라를 가리킨다.

그런데 직접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는 이들이 각자 아이를 낳았을 때의 상황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갈은 여종으로서 육체에 따라, 그러니깐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스마엘을 나았다.

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본처로 자유로운 여인이었고,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삭을 나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아들을 낳게 되는 방식이다.

종의 신분으로 육체에 따라 아이를 낳은 것과 자유의 몸으로 약속에 따라 아이를 낳은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 부분을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한다.

본문 24절 상반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본문의 비유가 헬라어로 알레고레오이다.

바울은 두 어머니와 두 아들, 즉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 이 역사적 사실의 배후에는 또 다른 영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본 것이다.

 

바울의 해석은 이렇다.

본문 24절 하반절에서 25.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앞에서 언급된 아브라함의 두 명의 아내 중에 한 사람이 하갈임을 밝힌다.

이 하갈은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을 자라고 말하고 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에 해당하는데, 이 산이 현재의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자녀들과 함께 종살이하고 있다고 전한다.

바울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니라 시내 산 언약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갈이 종노릇 하였듯이 시내 산의 옛 언약 아래 있는 그녀의 아들 역시 종노릇 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시내 산 언약은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지만, 구원은 얻지 못하고 율법의 종노릇을 하게 될 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본문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다른 아내는 사라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 바로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은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알레고리 적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사야 541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본문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에서는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 혹은 남편이 없는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것으로 더 많은 자녀를 낳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바울은 이 부분을 사라의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나이가 많아져 잉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본문을 공통적인 상황으로 본 것이다.

이사야의 이야기와 사라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나타나고 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 남편조차 없는 여인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더 많은 자녀를 얻게 된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낳을 수도 없게 된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과 초자연적인 간섭을 통해 더 많은 자녀를 얻게 되었다.

바울은 이 두 이야기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생명이 창조되는 면에서 같은 맥락의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종이었던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자였던 사라의 자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삭이며, 참된 약속의 아들인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본문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삭의 출생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이방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 역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인용된 이사야와 이삭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내 산의 자녀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율법의 종노릇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라디아 성도들을 이삭과 연결시키면서, 또한 이삭의 경험을 갈라디아 성도들의 경험과도 연결시키게 된다.

본문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바울은 창세기 21장의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삭이 젖을 뗐을 때, 아마도 2살 정도 되었을 때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십 대였던 이스마엘, 즉 육체에 따라 태어났던 이삭의 이복형이 이삭을 조롱하는 일이 있었다.

바울은 이것을 박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 안에서 자유로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율법주의자들의 공격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던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켜야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잘못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 형식주의자들의 박해이고, 핍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하였다 하여도 아브라함의 진정한 상속자는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라는 사실이 변할 수는 없다.

본문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이삭과 이스마엘은 결코 함께할 수 없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를 듣고 아브라함은 매우 근심하게 된다.

당연한 것은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의 아들을 내어 쫓을 수밖에 없었다.

오직 온전한 상속자는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삭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들이 어떤 미사여구로 미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짜이며, 율법의 종노릇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일한 상속자,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육체의 아들, 율법의 종으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본문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과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 곧 사라의 자녀들이다.

이삭과 같은 존재이며, 자유한 사람이고, 참된 상속자이다.

율법에 얽매여 육체의 한계 속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약속의 자녀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 종이 되려고, 쫓겨난 이스마엘과 같이 되려고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오늘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는 구약성경을 알레고리 적으로 재해석하였다.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을 인용하며 시내 산의 율법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아들이야말로 참되 상속자이고, 참된 자유자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스마엘이 질투하여 이삭을 조롱했던 것처럼.

율법주의자들의 영적 질투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유혹하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상속자이듯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율법주의자들의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당부하고 있다.

오늘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외침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각인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우리는 믿음 하나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 믿음을 삶에서 실천함으로 구원받은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영혼이 살고,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믿음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믿음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믿음을 포기하고 그것을 선택하셔야 한다.

믿음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직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그런즉 믿음의 신앙 공동체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자녀가 아니요, 믿음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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