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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8 위선적 행위를 비판하며(갈라디아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갈라디아서 5:22~26)

by TwoTalents 2020. 8. 31.

이미지 출처 - 티스토리 블로그 '시골 아빠'

제목 : 열매를 맺을 때까지...

 

본문 : 갈라디아서 5:22~26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말씀 :

지난주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 즉 육체의 일에 관해서 나누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런데 육체의 소욕을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제시하였다.

오늘은 바울이 전하는 성령으로 사는 삶에 대해 나눌 것이다.

 

먼저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본문 22, 23 상반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앞서 말 한대로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치는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을 좇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성령의 열매를 전하게 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는 부분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그리고 절제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의미를 찾는 설교를 자주 한다.

그 작업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본문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나열된 항목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가 본문의 나열된 아홉 가지가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로 대표성을 가지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하나의 항목보다는 이 성령의 열매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패턴, 공통적인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에는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물론,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사람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는 것이 없다.

이 부분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의 차이가 극명하게 비교된다.

육체의 소욕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한 삶이다.

크게 봐도 내 가족을 위한 삶이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은 크든 작든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유익을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양보하고,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육체의 일에 대비하여 성령의 일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일이 과정이라면, 열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바울은 이례적으로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좋은 결과를 낳는 과정의 지속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 이웃을 위해 내가 좀 손해 보고, 양보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그리고 절제라는 열매가 맺어질 때까지 꾸준히 계속해서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삶,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삶이 육체의 일,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한다.

본문 23절 하반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본문의 법은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실제 원문은 번역하기가 참 까다로운 부분이다.

원문에 의하면 율법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율법이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대립해서 이길 수 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율법 아래서의 삶은 생명의 힘을 소유하지 못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이 실제로 요구하는 삶의 내용은 성령의 열매 맺는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사랑인 것처럼, 율법은 성령의 열매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누었던 것처럼 율법 자체에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을 능력이 없다.

그런데 성령의 이끄심으로 열매를 맺을 때, 율법이 원래 요구한 것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에 관해 설명한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성도들의 현재 모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본문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 그리고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육체는 물리적인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육체는 헬라어로 사륵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육체’, ‘이라는 뜻과 함께 인간성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깐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그때의 인간성을 모든 욕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못 박음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분명하게 이 못 박음의 주체를 그리스도인 스스로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거짓된 재판의 결과로 로마 병정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시겠다고 결심하신 것이다.

충분히 피하고 막을 수 있는 것을 그냥 그대로 감당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인간을 위한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못 박으신 것도 아니다.

이 못 박음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옛사람을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죄인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주님께로 돌아서는 결단이었다.

갈라디아 성도들도 이렇게 옛사람을 스스로 못 박고 결단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상해져 버린 것이다.

주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육체를 과감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이 다시금 육체적 가치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으로 도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바울은 주님을 믿음으로 육체의 일을 못 박았던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도로 육체로 돌아가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경고한다.

본문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바울은 앞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끝내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전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마치 마라톤에서 첫 스타트를 끊고는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서 결승점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 것과 같은 모습이다.

본문에 행할지니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군대가 발걸음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인들이 구령에 맞추어 한 방향으로 행진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사람은 성령의 뜻에 따라 성령이 행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마지막까지 성령으로 끝내라는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행진하는 삶을 살려면, 그들은 당연히 서로를 비교하며, 자극하고 시기하는 파괴적 경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본문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은 진짜 영광이 아닌 것이다.

영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본문의 문맥상으로 여기서의 헛된 영광은 할례나 절기 준수 등과 같은 외적인 율법 행위를 지킴으로 얻어질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주에 언급했던 것처럼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키는 것으로 참된 유대인이 된다는 거짓 가르침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되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헛된 영광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참된 유대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잘못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에 의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지, 예수님 잘 믿고, 말씀 잘 따르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변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 된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방인으로서 단지 주님을 잘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주님이 좋았고, 예배하고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늘 감동이었다.

그런데 좀 알고 나니깐 다른 생각, 자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유대인이고, 다윗도 유대인이다.

자신들을 전도한 바울도 유대인이고, 무엇보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다.

그러다 보니 유대주의자들의 헛된 주장처럼 유대인 자체가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주님을 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할례도 받고, 절기도 잘 지켜서 진짜 유대인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욕망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사람에게 보이는 믿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과 다툼이 일어나고 서로 노엽게 하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육체를 따라 헛된 영광을 구하다 보니 일어난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 오래 하고 믿음이 좀 깊다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순수했을 때, 그저 주님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을 실천했던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가 언젠가부터 자기가 만족하고, 스스로 기뻐하는 행위로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던 것이 마치 자신이 이룬 믿음의 업적처럼 인식해 버리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육체를 따라 헛된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빨리 정신 차리고 주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바울은 성령에 이끌리는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헛된 비교의식과 파괴적인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다투고, 시기한다는 것은 성령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을 향한 믿음 자체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방향이 성령이 이끄시는 삶의 방향과 어긋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육체의 욕망에 휘둘리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육체의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도록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께서 설정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마지막까지 율법 아래 들어가 있다면 결국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 때문이다.

그 파멸을 막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시작한 대로 성령을 따라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바울은 전하고 있다.

 

말씀 마무리.

오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과 그렇게 하기 위해 성령과 같은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공통적으로 꾸준함과 지속성을 요구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꾸준히 성령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중간에 방향을 틀거나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령이 제시한 길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는, 꾸준하면서 지속적인 삶이 결국,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삶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성령과 함께하는 꾸준함과 지속성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바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다고 내일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사랑의 씨를 뿌리고 꾸준히 가꿀 때, 그럴 때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성령과 같은 방향으로 동행하는 것도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 탄탄대로가 놓여있고 그냥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탄탄대로도 있지만, 좁고 험한 길도 있다.

성령이 제시한 방향이 맞음에도 가시밭길이 있고, 돌무더기 길도 있으며, 어떤 때는 아예 담으로 막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믿고, 멈추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의 열심을 인정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코로나 사태가 너무 길다고 한숨을 짓는다.

교회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면서 슬슬 지쳐가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 발생하는 교회 속의 확진자 때문에 불신자는 물론 성도들까지도 짜증스러워하고 있다.

 

저는 이 과정이 교회적으로 알곡과 쭉정이, 진짜와 가짜가 나뉘는 과정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이 사태가 긴 것은 그만큼 걸러내야 할 쭉정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짜증 내거나 지쳐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기도해야 한다.

정부가 예배를 못하게 막는다는 헛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예배한다고 고백했던 자신의 다짐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예배의 형태가 바뀌어도 주님을 향한 신령과 진정함이 변하지 않음을 보여야 한다.

 

앞서도 밝혔듯이 성령의 열매는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여서는 결코 맺어질 수 없다.

내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여야 맺어지는 열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내 이웃을 위해 교회가 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교회에서 확진자가 속출하고, 그로 인해 대통령이 직접 권고하였음에도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목회자들, 교회가 있다.

그들이 말하길 예배는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예배하다가 죽을지언정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저는 살려고 예배하는 사람이다.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배하는 사람이다.

예배하면서 살아야지, 왜 죽는가?

정해진 시간에, 꼭 예배당에 나가서, 반드시 함께 모여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진행되어야 진짜 예배라는 주장은 무슨 궤변인가?

그렇게 이웃을 생각지도 않고, 민폐를 저지르든 말든 자기만족을 위해 진행되는 예배,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않는 그런 예배 때문에 죽을 생각이 전혀 없다.

 

여러분,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나면 과연 전도가 되겠는가?

지금 몇몇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으로 인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나 있겠는가?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판단을 허락하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던 주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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