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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46 한마음, 한뜻, 한몸(고린도전서)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8~31)

by TwoTalents 2020. 6. 3.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십자가의 도.

 

본문 : 고린도전서 1:18~3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말씀 :

어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신앙적으로 건실하게 잘 성장한 교회였다.

그런데 그런 고린도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그중의 하나가 성도 간의 분열이었다.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분파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역시 어제 나누었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특정 종교지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각각의 무리를 이루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따지며 파당을 이루고 만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세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그 복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십자가가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명하게 두 가지로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어리석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능력이다.

본문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그 는 헬라어로 로고스를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그걸 이치라고 번역했고, 새 번역은 말씀으로 번역했다.

현대어 영어 성경은 메시지, 그리고 루터는 말씀으로 번역했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언어, 가치, 이성, 근거라는 뜻을 가진다.

의역하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다.

십자가의 로고스는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영성이라고 생각하면 무방하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도는 구원과 연관되어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이지만, 세상의 지혜를 좇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라는 것은 참으로 무익한 것이다.

본문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바울은 구약 성경 이사야를 인용하여 세상 지혜가 주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장이라도 폐할 수 있는 것이 세상 지혜이다.

그리고 그 세상 지혜라는 것은 결국은 창조된 세상의 일부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본문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본문에는 지혜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온다.

그러면서 세 종류의 사람들이 거론된다.

지혜 있는 자, 선비, 그리고 변론가이다.

이들은 당시에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표면적으로 존경받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지혜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세상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는 하찮은 것인가?

세상 지혜만 가지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을 수 없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혜인 것이다.

나를 구원하지도 못하는 지혜가 어떻게 진정한 지혜일 수 있는가?

본문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어차피 세상의 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도라는 것이 실제로 미련한 것이기 때문에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참 진리를 모르고, 참 지혜가 없는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본문 22~25.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 중요했고, 헬라인에게는 자신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혜가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느 젊은 범죄자의 죽음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십자가를 대속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그저 개죽음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는 표적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기적을 원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온다.

모세, 여호수아, 다니엘, 요나.

구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십자가는 다르다.

물론 예수님도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이적을 보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그의 십자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혀 능력이 없었다.

예수님은 가장 무기력하게 죽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예수님의 처절한 절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란 실패자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이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들은 철학을 사랑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 깨닫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겼다.

그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알려고 노력했고,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은 세상을 바꾸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지혜는 제자들을 통해 후세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뛰어난 제자들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스승이라고 인정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십 대 초반에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제자들에게 마저 버림을 당한 한심한 사형수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지혜와 전혀 무관해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시대의 가치를 거슬러서 말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이 다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으니깐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옳은 대답이다. 정답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바울에 이런 주장마저도 어리석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시했었다.

기독교 신앙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교회 성도들 중에는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이 많았다.

본문 26절에서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마치 실패자들의 모임과도 같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과감하게 선포한다.

본문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약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 약한 자들을 통해 자신이 강하고,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고백한다.

 

이 부분을 28절에서 더 생생하게 전한다.

본문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세상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택하시어 세상의 지혜를 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폐하려는 헬라어 카탈게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동사로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소멸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세상 지혜를 완전히 쓸모없게 하고, 아예 소멸시켜 버리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이 멸시한 자들, 천하다고 여겼던 자들의 참된 지혜를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니깐 바울 당시에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칭송받던 이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는가?

없었다.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 이들이 아무리 떠든다고 권력자들이 반응이나 하는가?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권력과 명예와 돈이 있는 사람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에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자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그저 개, 돼지 취급할 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이 진술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봐야 한다.

지금 당장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숨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그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게 드러나는 순간에 그걸 무시했던 이들은 모두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잘난 척하던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참된 지혜라는 사실을 실제 삶을 끝까지 살아 낸다면.

결국,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때, 세상이 미련하다고 여겼던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적어도 한국교회의 상황은 본문과 많이 다르다.

오늘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은 무조건 연약한 이들이 아니다.

모두 가난하거나 지식이 없거나 명예가 없거나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비교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이다.

앞서서 고린도 교회는 파당을 이루었고, 그것을 종교적으로 분파주의라고 정의했다.

분파주의는 자기 말, 사람의 말과 주장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자랑이다.

본문 29~31.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인간이 구원에 대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인간의 공을 말한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자랑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이요, 영광이며, 경배의 대상인 것이다.

 

예수 십자가를 믿지만 다른 것도 다 중요한 게 아니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

자랑 좀 하면 어떠한가? 그것이 결국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그냥 구원받기 위한 수단, 종교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현실에서의 세상살이는 세상의 가치를 살피며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 아니 목회자도 아주 많이 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세상살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공부도 해야 하고, 돈벌이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세상살이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내가 진정으로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항상 인지해야 한다.

우리의 원함이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인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천국을 향해 한창 나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도, 균형을 맞추며, 절제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대적인 능력이라고 인정하는 돈, 재력.

그것들이 세상 삶의 방편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구원의 참된 능력이 될 수는 없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 나를 천국으로 이끄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은혜가 내 삶과 일치될 수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비록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 힘들어할지라도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부활의 신앙이 내 안에 녹여져 있다면, 오늘 나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 부활을 꿈꾸며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거기서만 삶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다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가 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놀라움은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마음 신앙공동체의 모든 가족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혼 깊이 이해하고, 인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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