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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6 아포칼룹시스 요안누-요한계시록(I)

열심을 내어 (요한계시록 3:14~22)

by TwoTalents 2020. 5. 28.

이미지 출처 -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티스토리 블로그)

제목 : 열심을 내어.

 

본문 : 요한계시록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 :

주님께서 편지하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편지를 나눌 것이다.

계시록에 언급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또한, 모직 공업의 중심지였다.

양모 산업이 발달한 상당히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고,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던 도시였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몇몇 학자들이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바울에게 알린 에바브라에 의해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주목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장 부유한 도시 안에 있다 보니 교회 역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현대의 한국교회와 비슷한 모습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비교해서 밖으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으로부터 이단의 유혹을 당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믿음의 문제나 성도의 도리에 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그저 부유하고 편하다 보니, 신앙의 생기가 죽은 이름뿐인 교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일하게 책망만을 받았던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이 문제적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본문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앞선 여섯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어서 나올 내용에 맞게 주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뒤이어서 충성, 증인, 근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앞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유일하게 주님의 책망만 있었던 교회임을 밝혔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그들이 미지근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본문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먼저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알고 계시다고 선언하신다.

앞선 여섯 교회에도 동일하게 하셨던 말씀이다.

좋은 행위이던지, 나쁜 행위이던지 주님은 다 아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주님은 이들의 상태를 모르고 얘기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형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 하나의 모습을 취하라고 당부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셨을까?

결단코 미지근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까?

그 이유를 바로 뒷 절인 16절에서 밝히고 계신다.

본문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신 이유는 미지근하면 입에서 토해내야만 했기 때문인 것이다.

삼킬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은 마셔야 하는데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미지근함은 먼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함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미지근하다라는 말은 차다’, ‘덥다는 말과 상반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무익하고 무력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실생활에서도 고대 중동 사람들은 먹는 물이든, 제사에 사용하는 물이든 아주 뜨거운 물이거나 아니면 아주 차가운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그 당시 관습이었다.

미지근한 물은 아예 마실 수도 없는 물로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깐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마실 수도 없는 물과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열심에도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조금 전에 미지근한 물을 그들은 마실 수 없는 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실제로도 라오디게아 지역 사람들에게 미지근한 물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물이었다.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온천 지대였다.

뜨거운 온천물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깐 그들에게 뜨거운 물은 아주 유용한 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뜨거운 물을 차갑게 하면 온천물에 녹아있던 여러 가지 성분들이 침전되어 가루로 가라앉게 된다.

그 가루를 이용하여 눈병을 치료하는 안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앞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만큼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전했었다.

그들은 온천물에서 침전된 가루를 이용하여 브루기아 가루라 불리는 안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눈병 치료 약은 매우 뛰어나서 많은 이들이 찾았다고 한다.

이 안약 때문에 라오디게아는 의료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차가운 물도 그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지근한 물은 참 애매하다.

피부병을 낫게 해주지도 않고, 안약을 만들 수 있는 가루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맛이 텁텁해서 마실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그곳의 미지근한 물은 토해낼 수밖에 없다.

미지근한 물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물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 안에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교회임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멈춘 상태로 있으니깐, 그 교회 자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본문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라오디게아 도시가 부유했던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 또한 부유한 교회였다.

그들 스스로도 부유하였기 때문에 부족함 없이, 바랄 것도 없이 생활하였다.

자기들 스스로 만족하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교회였다.

하지만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너희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18절을 통해 특단의 조치를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시련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련의 연단을 통해서 믿음을 바로 세우고 영적으로 부유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양모와 특산물인 안약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그들의 영적 벌거벗음과 소경 됨을 먼저 치유 받으라고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19절을 통해서 이 모든 조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 안에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고 징계를 내리심을 밝히신다.

쓸모없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당장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신다.

본문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먼저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신다.

이 교회에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들아!’

더 이상 그러면 안 된다.’

열심을 내어라.’

최선을 다해라.’

뜨거운 물이 피부병을 낫게 하고, 차가운 물이 안약을 만들어 내듯이.’

너희가 뜨겁든지, 차갑든지, 어떤 모습으로라도.’

하나님 안에서, 교회 속에서 쓰임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회개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대화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당연히 회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영성은 충만하게 깊어지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영적으로, 그리고 교회 생활적으로 모두 회복되어야 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전하시는 이 말씀을 마치 그들의 닫힌 문을 열기 원하시는 주님의 두드리심으로 표현하신다.

본문 20, 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말씀인가?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 즉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가 주님과 더불어 먹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주님과 함께하는 자, 주님의 가족, 주님의 식구라는 것이다.

가족이니깐 같은 곳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행하는 자가 바로 이기는 자, 승리자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책망뿐인 라오디게아 교회이지만, 지금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회개하고 바로 행한다면, 그들은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주님과 함께 그 보좌에 앉을 것을 선포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말씀은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영의 귀가 열린 자는 모두 들을 것을 권고하신다.

본문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와 같이 착각에 빠져있는 교회, 앞으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교회, 충성되고 열심인 교회이지만 행여나 교만해질 수 있는 교회.

모든 교회가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자신들 돌아보고, 겸비하여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의 실질적 부분에서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위 대형교회라는 곳에서 세미나나 강의를 자주 했었다.

그래서 그곳의 분들과 친분을 쌓았다.

구세군에서도 장년부가 100여 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에서 사역 했고, 실습도 했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교회에서도 교회에 일할 사람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목회자들이 함께 일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사람이 100명이나 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일을 계획했는데 막상 맡길 사람이 없다.

100명의 명단이 눈앞에 있는데, 누구 하나 선 듯 이름을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있다.

그런데 일할 사람은 없다.

개중에 한두 명 열심을 내어 일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일을 하고, 다음에 또 하고, 했던 사람이 한 번 더 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일을 하고, 또다시 그 사람이 또 다른 일을 하게 되고.

이런 현상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

그러니깐 그나마 열심인 그 한두 명이 금방 지쳐버리고 시험에 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예전의 목사님들은 설교만 했었다.

사도행전 속 베드로의 고백처럼 기도와 말씀에 전무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니깐 전하는 말씀의 영적 질이 엄청나게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일을 더 한다면 성도들 성경 공부를 가르치는 정도였다.

예전에는 학생회도 학생 자치였고, 청년회는 두말할 것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다 계획하고 진행했다.

담당 목회자는 그냥 전체적으로 조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일을 목회자가 직접 나서야 진행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나마 중소형 교회에서는 거의 모든 일을 목회자가 하고 있죠.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의 역할이 성도들에게 물이 있는 곳을 제시하고 물먹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아예 입만 벌리게 하고 거기에 물을 넣어주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우리 교회처럼 실제로 사람의 수가 적게 한정되어서 그런 것이야 어쩔 수 없는 경우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장년이 100명이 있어도, 200명이 있어도 사정은 비슷하더라는 것이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고, 깨닫고, 준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교회는 어떻든지 간에 우리 한마음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차갑든지 뜨겁든지 쓸모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다섯 명이 있으면 다섯 명의 몫을 해내고, 열 명이 있으면 열 명의 몫을 해내는 교회이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10명이 되든지 20명이 되든지, 100명이 되든지 200명이 되든지.

그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쓸모없는 성도라고 주님께 책망받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100명이 있어도 일할 사람 하나 없어 헉헉거리는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10명이 있어도 모두가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 움직이는 놀라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복 주심을 믿고 의지한다.

그런 우리를 향해 열려진 천국 문을 그 아무도 닫을 수 없음을 믿고 확신한다.

구세군 한마음교회라 쓰고, ‘주님께 충성이라고 읽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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