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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19 호흡이 있는 자마다(시편)

복 있는 사람은...(시편 1편)

by TwoTalents 2020. 5. 1.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복 있는 사람은...

 

본문 : 시편 1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말씀 :

시편의 말씀은 구약에 속해 있다.

그렇지만 시편만의 독립적인 특별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예전에 파란색으로 된, 신약만 있던 성경책을 혹시 기억하는가?

그 책에는 신약과 더불어 시편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 성경책은 새 신자나 초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로 주어졌던 성경이었다.

그러니깐 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약과 시편 정도는 꼭 알아야 한다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시편에는 다른 구약의 책에는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구약의 책들은 한정된 시대의 것이거나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창세기는 창세부터 요셉까지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구속을 주제로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다른 역사서나 성문서, 선지서들도 각각의 주제를 그 시대의 이야기로 말한다.

그런데 시편은 그렇지 않다.

시편은 구약의 거의 모든 시대가 다뤄지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주제를 이야기한다.

 

시편은 1편부터 150편까지 150개의 시로 구성된 책이다.

대부분의 시편은 다윗의 작품이다.

하지만 적어도 6명 이상의 다른 기록자들이 더 있다.

모세, 솔로몬, 아삽, 에단, 헤만, 고라 자손들의 작품을 시편은 담고 있다.

그리고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시편도 몇몇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들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세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귀환까지, 1000여 년 동안 여러 저자에 의해, 여러 장소에서 기록되고 편집된 책이 시편이다.

 

그리고 시편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의 모음집이다.

실제 히브리 원어의 뜻에는 시들의 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프살모이’(Psalmoi),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영어의 ‘Psalms’는 헬라어를 음역한 것이다. (P는 묵음)

한글 성경에서는 히브리 원어의 뜻을 반영하여 시들의 책, 시편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니깐 시편의 핵심어는 찬양이다.

150편의 시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 그분이 행하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에 대한 찬양을 주로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탄원의 시, 감사의 시, 제왕의 시, 지혜의 시 등등의 시편도 있다.

여기에는 율법과 역사, 예언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과 경배가 담겨 있다.

한마디로 구약 속의 모든 이야기를 찬양의 시로 담아낸 것이 바로 시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함께 나눔으로 구약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온전히 알아가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시편을 통해 보여지는 신약의 사상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 기쁨이나 슬픔, 확신이나 혼돈 등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바르게 찬양하고,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의 시들은 시의 저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 기쁨이나 슬픔, 확신이나 혼동 등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고백들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그들의 몸부림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하고, 목소리 높여 하나님을 경배한 노래들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우리가...

슬픔과 혼란에 빠져있을 때, 두렵거나 상처받았을 때, 앞으로 나아갈 바를 찾지 못할 때, 자기의 죄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때, 혼자라고 슬퍼하며 눈물 흘릴 때, 나를 이해해 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

우리는 시편을 통해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다.

 

모세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회복시키신 하나님께서, 시편의 모든 기자들과 함께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동일한 사랑과 응답으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믿고 확신한다.

 

시편의 묵상 나눔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하게 체험하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제 첫 번째 시를 나누려고 한다.

시편 1편은 시편 23편과 함께 시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혀지는 대중적인 말씀이다.

그리고 설교의 본문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시편의 서시라고도 불린다.

 

시편 1편은 인생에서의 복된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되고 다른 한 사람은 악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말씀은 진행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비교할 때는 서로 상반된 성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비교된 두 사람은 얼핏 보면 상반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다.

복이 있다는 것과 악인은 조금은 다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 6절에서 복 있는 사람의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깐 복 있는 사람의인이며 의인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 시편 1편은 바로 의인악인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1편은 의인악인의 비교 자체를 그 주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진짜 주제를 나타내기 위한 문학적 묘사일 뿐이다.

시편 1편의 주세는 의인’, 바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그가 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건지, 그의 결국은 어떠한지에 대해서 저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한다.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이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되어진다.”가 아니고 이러 이러한 사람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서술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악인의 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도덕적이지 못한 요소가 함께한다.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편법으로 자신의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사람을 처세에 능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한다.

하지만 시편에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거의 같은 맥락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직접적인 불법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복 있는 자는 불법의 길은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눈에는 넓고 좋은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사망의 길일 뿐이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NIV 영어 성경에는 오만이라는 말에 ‘mocker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흉내 내며 놀리는’, ‘조롱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은 남을 조롱하고 흉내 내면서 놀리는 그러한 자리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조롱과 비웃음을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이러한 자리를 만들지도 않고,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복 있는 자의 금지 사항을 설명한 저자는 본문 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이 실천하는 것을 서술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을 의미한다.

그 말씀을 하루 종일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복 있는 자와 악인의 상태를 비교하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본문 3, 4.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저는 예전에 이 구절을 읽을 때 심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었다.

복 있는 사람, 즉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의 길로 가는 사람은 모든 일에 형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내 삶은 왜 이런 것인가?

형통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적이 더 많은데, 그럼 나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인가?

누구 말처럼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더 기도하고, 더 갖다 바쳐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못된 기복신앙의 시각을 벗어난 관점이 필요로 하다.

내가 듣기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말씀을 찾아야만 한다.

 

3절 말씀을 다시 읽겠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 말씀은 우리 현실 경험과 딱 들어 맞지 않다.

아니 공평함이 없고, 진리보다 성공이 우선인 인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의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이다.

이것은 시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이런 고백은 하나의 인사치레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아부성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은 참되고 진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분명히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그들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본문의 형통하리로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과연 시인의 고백 속에서 형통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말을 내 욕망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거짓이 되어버린다.

계속 언급했듯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더 많다.

불법이 난무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데, 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랬고, 사도들의 운명이 그랬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다.

그럼 여기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봐야 한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불행한 이들인가?

우리는 불행한가?

세상의 기준,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승리자들이다.

나와 여러분은 승리자이다.

 

어느 순간에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 있다.

우리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먼저 가셔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이다.

복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기억하고, 그곳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들은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답답해할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이다.

그들이 어리석다고 말한다고 정말 우리가 어리석은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악인들, 꾀부리는 자들이 부자가 될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성은 모래 위의 집과도 같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든든하다고 여겼던 그들의 집은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마지막 날의 심판이다.

시인은 악인을 가리켜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라고 말한다.

본문 4, 5.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의인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이 결단코, 허락되지 않음을 말씀하신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들, 악인들을 위해 준비된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본문의 마지막 절인 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만약에 시인이 의인의 길은 흥하고,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라고 했다면, 저는 그리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다소 생뚱맞은 표현을 사용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본문의 인정은 히브리어로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정하다와 함께 알다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잘 아시고, 그 길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꾀를 부리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걷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모임에 함께하지 않는 그 노력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의인이 율법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찬양과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알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하나님께서 알고 있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은 비웃고, 이상하게 여기고, 손 가락질 한다 할지라도...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릴 위해 천국을 준비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계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하고 귀한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형통함인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죄인의 길을 갈 필요가 없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주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우리가 걷는 길을 인정하실 것이다.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 나를 인정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자들에게 약속된 최고의 형통함임을 기억하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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