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19 호흡이 있는 자마다(시편)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시편 5편)

by TwoTalents 2020. 5. 5.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본문 : 시편 5편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말씀 :

시편 5편은 시편 3, 4편과 마찬가지로 원수에 의해 압박받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시이다.

다윗은 시편 5편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다루면서 자신의 기도가 응답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다윗은 여호와께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시기를 간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본문의 심정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기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은 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림’, 끙끙 않는 시름 소리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 시름 소리 정도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기도조차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내 곧 큰 소리를 내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본문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의 실체, 즉 참된 왕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긴박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것을 작은 소리로 시름 하던 기도가 큰 소리 내는 기도로 발전하였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방법이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든지 간절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간절함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다윗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기도한다.

본문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호와께서 아침부터 반드시 자신의 기도 소리를 들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바라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기다릴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4~6.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주님과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죄악과 구별되시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오만한 자, 즉 자기 자랑하기 바쁜 자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인데, 자기 자랑만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된다.

악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거짓말하는 자에 대한 용서란 있을 수가 없으시다.

사람에게든 하나님에게든 인간은 반드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경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들을 경멸하신다.

본문의 거짓말하는 자속이는 자는 비슷하지만 같은 의미는 아니다.

본문의 거짓말은 히브리어로 카자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거짓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속이다는 히브리어로 미르마라는 단어이다.

교묘하게, 간사하게, 사기 등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상대를 교묘하고 간사하게 속여서 사기를 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에는 속인은 자사기꾼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명 적인 거짓말이든, 남을 속여 이익을 취하려는 사기성 짙은 거짓말이든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다 싫어하시고 경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서 본문 7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본문의 주의 풍성한 사랑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주어지는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며 지성소로 올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악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질과 다윗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작정하신 주님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실 자신의 구체적인 기도 내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본문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다윗을 공격하는 원수들 앞에서 다윗을 인도하실 것을 간구한다.

악을 싫어하시고, 악인을 경멸하시는 주님의 본질, 주님의 공의를 그들 앞에 나타내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원수들 앞에 나타내시는 것이 왜 다윗에게 응답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지금 다윗을 둘러싸고 있는 원수들이 바로 악인들이기 때문이다.

본문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단순히 다윗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의를 나타내시라는 것이 아니다.

그 원수들이 신실함이 없고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는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악해서 말하는 모든 것에 사람들 죽일 수 있는 악한 말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권력자들 앞에서 아부하고 간신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게 되면 다윗의 원수들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이제 구체적으로 자신의 원수인 악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본문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원수들이 심판받아 마땅함을 다윗은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내용, 즉 원수나 대적자, 악인을 벌하시라는 믿는 자들의 고백을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대치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둘 중의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결코 대치점이 아니다.

일단 구약의 사상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스스로 고백하셨다.

그렇다면 구약시대는 율법이 온전하게, 완전하게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초기 단계이다.

그것이 계속 발전되면서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잣대로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냥 그들의 죄를 눈감아주라는 말씀이 아니다.

원수가 무슨 죄를 저질렀든지 그냥 덮어주고 모르는 척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은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것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이 원수를 향한 참된 사랑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될 수만 있다면, 필요에 따라 강한 징계도 있어야 한다.

달래서 깨달을 수 있다면 달래야 할 것이고, 몇 대 두들겨 맞는 것으로 알게 된다면, 가슴 아파도 때려야 한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인데, 하나님 징계는 징계이면서 기회이고, 벌을 내리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주시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원수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한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 피하는 자의 기쁨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본문 11, 12.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다윗은 자신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기뻐할 것을 종용한다.

그 기쁨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의인 된 자들,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들의 공격에 방패가 되어 주시고, 놀라우신 은혜로 호위해 주시며 직접 막아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에 사용된 복의 단어는 바라크이다.

시편 1편에 사용된 복의 단어가 아솨르였다.

아솨르가 말씀에 순종하여 그 대가로 얻어지는 복을 말하는 것이라면, ‘바라크는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로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는 말이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피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함께하시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만약 이 복이 바라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이 아니라, 원수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원수의 행위라고 설명된 것이 바로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문의 복이 행위와 상관없이 그저 하나님께 피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무조건 적인 복이 아니었다면, 이 시편 5편의 고백은 우리에게 저주의 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그늘 아래 피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만으로도 바라크의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린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우리가 다른 것은 할 능력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이 밀려와도, 반드시 하나님께로 피하는, 하나님을 먼저 찾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만은 무조건 잘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것만으로도 주님은 우리에게 방패가 되시겠다고, 호위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나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주님을 찾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칭하시고 복을 약속하셨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고, 오늘도 주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