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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6 아포칼룹시스 요안누-요한계시록(I)

내가 알고 있다.(요한계시록 2:8~11)

by TwoTalents 2020. 4. 24.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내가 알고 있다.

 

본문 : 요한계시록 2:8~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 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말씀 :

지난주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은.

교회에서 열심이고 삶에 있어서 수고하고 인내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버려버렸다면 모든 것은 헛된 열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첫사랑을 스스로 버린 것은 주님께 책망받을 일이며, 교회는 반드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은 회복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를 향한 촛대가 옮기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주님께서 편지하신 소아시아의 두 번째 교회 서머나 교회에 보내신 편지를 살펴볼 것이다.

 

서머나는?

터키 남부의 항구도시로 특별히 아름다운 항구가 유명한 곳이었다.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에베소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

그런 환경으로 인해 종교의 혼합화가 성행했었다.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고, 그것에 불응할 때는 박해가 주어졌다.

 

서머나 교회?

계시록 외의 성경에는 기록이 없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이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을 지냈고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는 주체는 에베소 교회의 동일하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그 주체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누구신가?

바로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바로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창조와 심판이 그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의 사상과 일치한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 되시고 하나님과 함께하셨던, 그가 곧 하나님이고 부활하신 주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편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뭘 알고 계신다는 것인가?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주께서 친히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황제 숭배를 거부한 서머나 교회였다.

그것으로 인해 환난을 당하고 궁핍함에 처해야만 했다.

본 절의 환난은 헬라어 들마신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무거운 물건 밑에서 눌려 부서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강제적 고통을 말하는 것이며, 참기 힘든 육체적 고통이 동반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궁핍의 헬라어 프토케이안외적 핍박으로 생긴 물질적인 빈곤을 나타낸다.

내가 게을러서,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가난에 처한 상태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께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의 짧은 말로 이렇게 위로하신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육신은 고통받고 궁핍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정결하고 부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시험을 받는 서머나 교인들에게 확신을 주신다.

유대인이라는 자들이 와서 서머나 교인들의 형편을 비방하고 떠들어 대지만, 그들의 말은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짜이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며, 오히려 사단의 회당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자칭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의 거짓됨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도 이런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당했고, 핍박을 받았다.

자칭 유대인들에게는 실제 진리,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조건 자신들의 주장이 진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메시아를 못 박아 죽인, 참람한 죄를 저지른 민족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진리를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좇는 믿음의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서머나 교회의 고난 역시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또다시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육신은 가난해 보이고, 고난과 핍박으로 고통받는 것 같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실상은 주안에서 부요이며, 주안에서 평안인 것이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명령하신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옥에 던져지고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의 10일은 그저 열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0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는 셈어의 언어적 표현이다.

그러니깐 짧은 기간 환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실제 환난의 기간이 짧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서머나 교회에 불어 닥칠 고난의 시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이겨내고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때 맞이하게 될 영원한 영광에 비한다면 고난의 기간은 참으로 짧은 기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죽을 각오로, 목숨 내놓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주님의 명령이다.

 

이렇게 죽도록, 죽음을 각오한 충성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생명의 관을 얻도록 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믿음을 지켰는데, 실상 그것이 내 영혼을 살리는 믿음의 승리인 것이다.

본문의 생명의 관은 또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것이다.

 

이렇게 핍박과 궁핍,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승리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앞 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탈굼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아주 친숙한 용어이다.

탈굼은 아람어로 된 주석으로서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번역된 주석을 말한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용어인 것이다.

 

둘째 사망첫째 사망이라 할 수 있는 육체적 사망에 대비되어,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최후는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영원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은 순교에 직면한 서머나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고 주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으로 두려워 떨었던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서게 될 것이다.

 

말씀 마무리…….

오늘 우리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궁핍에 처해져야만 했던 서머나 교회의 고난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의 고난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멈춰지는 고난이 아니었다.

그들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연속적인 고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 중에 유혹받았고, 환난 중에 시험당했다.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지금의 고난에서, 지금의 궁핍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다.

거기다가 자칭 유대인이라는 자들이 와서는 바울의 복음은 틀린 것이라고.

베드로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라고.

예수는 결단코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지금 당신들이 당하는 고난은 헛수고라고 자신들의 목소리로 현혹시킨다.

이 말은 곧 서머나 교회의 믿음 자체가 헛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핵심 믿음을 쥐어흔들고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가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주께서 그들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처음과 나중 되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서머나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그 어려움, 그 아픔을 주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누구보다 주님께서 그들의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계신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위로와 힘을 주실 수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이지만, 주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볼 때, 그것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작은 아픔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칭 유대인들이 아무리 거짓으로 속이려 해도, 주님은 우릴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말씀하셨다.

오직 주님만이 진리이심을 말씀하셨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는 결단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렇게 서머나 교회를 다시 일으키시고 새 힘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2천 년 전 서머나 교회가 당했던 고난과 절대기준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통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서머나 교회의 환난처럼,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무섭고 급박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아픔이 무조건 가볍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때와는 다르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던 또 다른 상황의 아픔과 고통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시대와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알다에 사용된 헬라어는 에이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알다라는 뜻과 함께 바라보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실 뿐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 아픔을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그것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며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의 위로하심으로 힘을 얻어서 고난 중에도 죽도록 충성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마음 신앙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음을 각오한 충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죽기를 각오한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 충성된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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