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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6 아포칼룹시스 요안누-요한계시록(I)

요한계시록, 현재를 위한 책.(요한계시록 1:1~8)

by TwoTalents 2020. 4. 2.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요한계시록, 현재를 위한 책.

 

본문 : 요한계시록 1:1~8

1.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 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말씀 :

요한계시록은 참 중요한 책이다.

그런데 그 중요성에 비해서 요즘은 거의 관련 설교가 보이지 않는다.

한때 한국에서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많은 설교가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문제점은 대부분의 요한계시록 설교가 세대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대주의 신학이란 인류의 역사를 7등분 7세대로 나누고,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신학이다.

휴거, 7년 환란, 천년 왕국 등의 말들이 주로, 자주 여기서 나온다.

 

그러면서 계시록 안의 신비적인 요소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정통 신앙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당시의 그러한 해석과 설교가 이단의 빌미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92년에 이장림을 중심으로 했던 다미선교회가 시한부 종말론으로 사회를 뒤집어 놓았다.

그 이후부터 정통 교회에서는 요한계시록으로 설교하는 것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요즘은 요한계시록이 이단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신천지에 빠졌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통 교회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요한계시록에 대해 신천지에서는 속 시원하게 답을 해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답이 잘못된 답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잘못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백배 낫다.

모르면 불편하고 말 것을 잘못 알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진행될 요한계시록 강해가 한마음 공동체 한분 한분에게 계시록을 읽고 깨닫는 것에 작은 기준을 제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혹시라도 궁금한 것,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담임 사관에게 질문하셔야 한다.

혼자 상상하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 인터넷에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많은 정보가 있는데, 태반이 잘못된 정보들이다.

그 수많은 정보 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여러분이 구분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궁금한 것은 담임 사관과 함께 해결해야만 한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강해 첫 번째 시간으로 요한계시록이 과연 어떤 책인지를 먼저 나누어 보려고 한다.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이냐에 따라 읽는 방법도, 관점도,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책과 역사책은 다르다.

과학책과 음악책도 다르다.

내용만 다른 것이 아니라, 기록된 형식도 다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규정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깨달을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계시문학이다.

본문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본문의 계시는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라는 말이다.

그 뜻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이다이다.

학자들은 계시보다는 묵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작은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는 묵시계시를 같은 선상에서 보겠다.

 

어쨌든 계시록은 계시문학’, ‘묵시 문학이다.

묵시 문학은 고대 유대적인 문학 장르 중 하나이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종말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원론적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상징과 환상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을 내러티브적 골격, 즉 이야기적 골자로 구성된 문학이 바로 묵시 문학이다.

요한계시록이 이런 종류의 글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신적 권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이 묵시의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계시록에 신적 권위를 나타낸 요한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본문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이 주님이 보이신 환상을 직접 봤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환상이고 자기가 본 것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환상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그리스도의 묵시로서 신적 권위와 확실성 안에서 읽어야 하는 책인 것이다.

 

두 번째로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이다.

본문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직접적으로 예언의 말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예언이 무엇인가?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언서라고 부르는 선지서도 그저 미래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다.

과거에 행하셨던 하나님의 사역을 해석하고, 그것을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적용시킨다.

그러면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괄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언인 것이다.

이 예언은 결코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과거를 해석하는 것도,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결국, 오늘날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3절에는 분명히 예언의 말씀을 지금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이런 책이다.

미래를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삶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요한계시록은 편지글이다.

본문 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는 서신서 즉, 편지이다.

교회에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편지가 아니라 공적인 편지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와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언어문화를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이런 것이 무시된 현대적 해석은 이단에 빠지기 딱 좋은 모습이다.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요한계시록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전달되었던 당시는 로마가 전 유럽을 지배하던 때였다.

로마로 인해 모든 교회가 핍박받고, 고통당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쓰여진 편지가 요한계시록이다.

지금은 로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속히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고통 중에서 교회가 회복될 것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까지 믿음을 잘 지켜서 천국에 가라는 미래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천국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라는 현재의 삶에 희망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요한계시록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고, 몇 명이 구원받고, 7년 환란이 언제고, 천년 왕국이 어쩌고저쩌고 가 아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실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슬픔과 아픔이 없는,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잘살겠다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거나, 무리하게 남을 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져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그런 책이다.

오늘 교회에 다 갖다 바쳐야 미래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가 아니라...

미래의 소망을 기억하며 오늘을 희망차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마무리.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이며, 예언서이고, 편지글이다.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천지는 철저하게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적 사고로 해석하고 있다.

본문 1절의 반드시 속히 될 일1절 이하 22장까지의 모든 내용으로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기록 당시에는 전혀 발생하지 않은 일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년이 지나서 이제 신천지에게만 주어진 환상 계시를 통해 말씀이 성취가 실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예언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였기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계시록을 미래적 사건으로만 보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묵시 문학의 형식, 예언의 성격, 편지글을 주고받는 당사자들의 상황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에 불과하다.

 

그런데 믿음이 좀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계시록에 대해 특별히 배운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록하면 그 사람들도 미래를 예언한 책으로 단순하게 이해해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일반 교회는 그 미래를 알려주지 못하는데, 신천지는 알려주니깐 이게 매력적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계시록은 단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서가 아니다.

과거를 해석하고, 그것을 오늘날에 맞게 적용하도록 한다.

미래의 소망을 밝히면서, 오늘날 희망을 품고 살아가게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포괄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고 있다.

 

144,000에 포함되기 위해 가족도 버리고, 사회질서도 파괴하면서 신천지에 충성하라는 말도 안 되는 해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천국 가겠다고 오늘의 삶을 내팽개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결코, 성경의 말씀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미래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희망찬 미래를 소망하는 오늘의 삶을 위한 책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한마음 신앙 공동체는 이제부터 함께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반드시 속히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꿀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아름다운 미래를 소망하며 희망찬 오늘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삶이 어려울 수 있고,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날 수도 있다.

때로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이셨던 하나님의 나라, 이제 곧 임하실 주님의 나라가 기억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를 기대하며, 여전히 승리함으로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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