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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고난 주간] 금요일 -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다.

by TwoTalents 2023. 4. 7.

제목 :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다.
 
본문 : 마가복음 15:16~32
16.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 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말씀 :
빌라도에 의해 정식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은 이제 채찍질을 당하시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본문 16절.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이 로마 군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근처에서 어렴풋이 들은 것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더욱 잔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본문 17~20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어제 나눈 대로 예수님의 죄목은 빌라도의 재판에서 신성모독이 아닌 로마를 향한 반역죄로 둔갑하였다.
로마 군인들도 예수를 반역자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우스꽝스러운 왕의 모습으로 치장시킨 다음 조롱하며 모욕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육체적 폭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실컷 예수님을 가지고 놀대로 다 놀다가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골고다로 끌고 간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 중에 가로목을 직접 짊어지고 가야 했다.
그런데 밤새 모욕당하고 구타를 당하신 예수님은 이미 그 육체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러니 계속 시간이 지체되고 진행이 더딜 뿐이다.
본문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그래서 로마 병정들은 그저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불러다가 억지로 그에게 예수님의 가로목을 대신 지게 하였다.
이 사람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다.
참고로 이 사람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 마가복음의 1차 독자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부분은 같은 본문으로 다음에 다시 한번 나누겠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도움을 받은 예수님은 드디어 당신이 죽게 될 곳, 골고다에 도착하게 된다.
본문 22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골고다는 이미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공공장소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십자가형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인들을 자주 보아왔다.
지금 예수님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완전히 공개된 상태로, 누가 보더라도 비참하게 실패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시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가 주어진다.
본문 23절.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여인들이 죄인을 위해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깐 죽어가는 사형수에게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주어지는 마지막 배려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거부하신다.
 
왜 이것을 거부하셨을까?
예수님은 오롯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당하시기 원하셨다.
약 기운 같은 것으로 피하고 싶지 않으신 것이다.
철저하게 고통받고, 철저하게 아파하시면서 가장 완벽하게 낮아지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사명이었다.
 
또한, 주님은 끝까지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기 원하셨다.
보통 이 정도 상황이면, 벌써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으셨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지키셨고, 십자가 위에서까지 말씀과 구원을 선포하신다.
육체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챙기는 것까지 잊지 않으셨다.
외면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맡아주실 당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해 당하시는 고통을 결코 피하지 않으셨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본문 24절.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마가는 예수님의 못 박히심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고’가 끝이다.
왜일까?
그것은 ‘십자가’라는 한 마디로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비참함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은 그것을 직접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구나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이신데….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하나 있는 옷가지마저도 찢어버리고 놀이하듯이 나누어 버린다.
예수님을 바닥까지 철저하게 농락하고,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25, 26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본문의 제삼시는 유대식 시간 계산법이다.
지금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전 9시가 된다.
예수님은 아침에 못 박히셨는데, 그의 죄 패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이다.
물론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에 반란을 꾸몄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실제 신분을 새기게 한 것이다.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왕을 로마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린...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성모독을 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본문 28~30절
 
“(없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지금까지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향해 이제는 정신적인, 영적인 모욕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나가는 자들이라고 표현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과 육을 철저하게 무너트리려 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재판장에 심어놓았던 그 사람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끈질기게 예수를 무너트리고 망가트리려고 폭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미소 지으며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본문 31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잡고, 폭력을 행사하고, 죄를 뒤집어씌우고, 빌라도에게 넘겨버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주도하고 진행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골고다까지 좇아 온 것이다.
지금 이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모욕과 고통을 감상하듯 즐기고 있다.
이들이 진정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맞는지….
그들 안에 있는 악함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진리를 말해 버린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들은 희롱하려고 떠들었는데, 이것이 실제 주님의 사역이었다.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시고 계신 일이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가 남은 구원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는 구원하지 않았다’가 맞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본문 32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끝까지, 마지막까지 예수를 조롱하며 비꼬고 있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보며 승리를 만끽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고 있고, 원하던 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다.
그들은 승리하지 않았다.
그들의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기들도 모르게 실수로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를 작정하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고, 아들이 순종하여 그 뜻을 이룬 것이다.
수많은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침묵하시며,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가장 낮게, 완전히 바닥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것이다.
그렇게 완전하게 낮아져야 아래에서부터 위에까지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고 고통을 주는 것으로 사탄은 예수님께서 포기하시기를 바랬을 것이다.
십자가를 포기하고, 낮아지시는 것에 그만두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억울한 고통과 고난을 감당하셨다.
치사하리만치 주어지는 수치와 모욕 다 받아들이셨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자존심?
그런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든지 내팽개치셨다.
어떤 유혹과 방법으로 방해하여도 주님은 결단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낮아지셨고, 거기에서부터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다.
 
이 기막힌 사랑을 믿는가?
 
2000여 년 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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