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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왕이 없던 시대 (사사기 21:1~25)

by TwoTalents 2020. 3. 25.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왕이 없던 시대.

 

본문 : 사사기 21:1~25

1.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9.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2.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13.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16.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말씀 :

오늘이 사사기 강해의 마지막 시간이다.

사사기 강해를 작년 4월 마지막째 주 수요일 예배부터 시작했었다.

오늘까지 11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44편의 사사기 설교가 이루어졌다.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졌는데, 오늘 더욱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사사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귀한 시간이길 기대하고 기도한다.

 

지난주에 우리는 범죄로 인하여 패망하게 된 베냐민 지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냐민 지파는 범죄자들을 옹호하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으로 인해 600명을 제외한 모든 지파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베냐민을 멸절시키는 도구로 이방인이 아닌 바로 나머지 11 지파, 이스라엘 연합군이 사용되었다.

그러니깐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늘은 이런 민족끼리의 슬픈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이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이 나타나고 있다.

 

비록 범죄에 대한 심판이지만,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를 너무 잔혹하게 진멸하였다.

베냐민의 성으로 쫓아가서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스라엘 중에 하나의 지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모여 이렇게 기도한다.

본문 2, 3.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전쟁에서 눈이 뒤집혀서 닥치는 대로 살상을 저질렀던 이스라엘 민족이 정신을 차려보니깐 현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눈물을 자신들의 잔인함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12라는 숫자를 완전수로 보는데, 12에서 하나가 빠지게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니깐 자기들이 저질러 놓고선 하나님께 원망하듯이 따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베냐민 지파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게 된다.

본문 6, 7.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각 성에 남아있었던 모든 여성을 다 죽여버렸다.

지금 베냐민 지파 중에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도망간 남성 600명만 간신히 남아있다.

베냐민 지파가 보존되려면 결혼을 하고 생육해야 할 텐데, 여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냐민 지파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여 후사를 이어야 할 텐데, 이것 역시 여의치가 않다.

? 그들은 이미 베냐민 지파에게는 자신들의 딸을 주지 않겠다고 다 함께 맹세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맹세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기들끼리의 맹세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자기들 좋을 대로 결정하고 있다.

어차피 이 맹세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이기에 그냥 번복하면 된다.

그런데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본문 8, 9.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갓 지파의 지역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연합군이 모일 때 함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왜 함께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지금 이스라엘은 폭력에 의해 멸절된 베냐민을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처음 연합군이 모였을 때, 그때 모이지 않은 이들을 반드시 죽일 것을 맹세했었다.

그 핑계로 길르앗 사람을 징벌하겠다는 것이다.

본문 10~12.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전쟁 때문에 폭력에 대해 무뎌진 것인지, 너무나 쉽게 살인을 결정해 버린다.

그것도 이방인이 아닌 같은 민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길르앗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에게도 그러더니 길르앗 주민들에게도 마치 범죄한 이방인 대하듯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은 처녀만 골라 살려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여버린다.

이때 살아남은 길르앗 처녀의 숫자가 400명이다.

지금 이 여인들을 남아있는 베냐민 남성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정상인가?

 

사사기 저자는 이곳은 가나안 땅이더라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가나안 땅이 맞다.

그런데 굳이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인가?

이것은 단지 지정학적인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이방 민족들이 살면서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도 없이 살던 그 가나안 땅이나 똑같다는 말이다.

 

이 난리, 폭력에 폭력이 거듭되고 난 뒤에, 이스라엘 연합군은 숨어있는 베냐민 사람들을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본문 13~15.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베냐민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로 얼마 전에 지파가 멸절되어 버렸다.

지금 이들에게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평화를 위해 또다시 한 지역의 사람들을 멸절시켜 버렸는데.

이것이 참된 평화인가?

이스라엘의 폭주는 정의도 없고, 사랑도 없다.

하나님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정신 나간 행동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400명의 길르앗 여인을 붙잡아 600명의 베냐민 남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면 200명의 여성이 부족하게 된다.

이걸 또 채우겠다고 이상한 짓을 해 버린다.

본문 16~18.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베냐민 지파를 걱정하면서도 계속 자신들의 허망한 맹세,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들끼리의 맹세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습이다.

단지 자기들의 맹세가 중요할 뿐이다.

잘못된 맹세는 번복하면 된다.

물론 당시의 맹세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똑같지는 않다.

하지만 율법적으로도 충분히 근거가 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의 규칙 때문에 그러질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러고는 한 번 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하는 것이다.

본문 19~21.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여자를 납치하라는 말이다.

명절날 실로로 춤추러 나오는 여자를 발견하게 되거든, 그들을 납치해서 자신의 아내로 삼으라고 공식적으로 허락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명절은 여호와의 명절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러 오는 여인들, 오늘날로 표현하면 예배하러 나오거나, 예배하고 나아가는 여자들을 기다렸다가 납치하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저주받을 말인가?

여성을 향한 존중도 없고,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자기들 맹세 지키겠다고 율법을 범하는 어이없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여성의 가족이 문제를 제시할 때는 자신들이 해결까지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본문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여성의 가족들을 향해 딸을 빼앗긴 것이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므로 괜찮다고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것이 범죄냐 아니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이런 건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들끼리의 맹세를 지키느냐 마느냐? 어기느냐 어기지 않느냐가 중요할 따름이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허락된 방법으로 베냐민 지파는 실로에서 여인들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아내로 삼게 된다.

이 여인들은 행복할 것 같은가?

이렇게 형성된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는 이스라엘 백성은 진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게 된다.

본문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 어이없는 전쟁을 통해 남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이 입은 상처이다.

 

이런 황당한 사사기의 마지막을 사사기 저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본문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의 시작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전쟁에 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여호와께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사기의 마지막은 하나님 없이,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행하고, 자기들 맹세만 지키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사기에 왕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의 왕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버렸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선민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끝을 알 수 없는 타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들먹이고, 율법을 들먹인다.

참으로 신앙으로 포장된 욕망의 시대, 죄악의 시대였다.

 

말씀 마무리.

그렇다면 이런 사사의 시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소속되어 예배 때마다 참석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앙공동체의 직분자로 무슨 부교, 무슨 정교, 무슨 집사, 무슨 장로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사기에서는 선민들의 약속의 땅이 이방인의 가나안 땅과 매한가지가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자기 욕망으로 모인 세상 모임과 그저 똑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19장부터 나누었던 전쟁 이야기는 존중받지 못했던, 한 레위인 첩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아무도 이 여인의 비극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아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 여인의 존중받지 못함은 한 성읍, 한 지파의 모든 여인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고 만 것이다.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은 계속 자기들 입장, 자기들 맹세, 자기들의 원함만을 주장하였다.

한 영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소외되고 상처받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민망한 상황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한 영혼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고민하고 있는가?

특별히 소외되고, 나약하고, 가장 작은 영혼에 관해 관심이 있기는 한가?

차별금지법을 대하는 많은 교회의 자세와 이번 코로나-19 때문에 주어진 정부의 모임 자제 권고를 대하는 많은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한국에서 교회라는 집단이 무슨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는 것인지 자괴감이 들기까지 한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교회가 제대로 알게 하고 있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아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는 하는가?

자기들 규칙, 자기들 생각, 자기들 편리대로 규칙이고 법이고 다 어기고 있는데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맞는 것인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이 자꾸만 이렇게 읽혀진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하나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더라

 

오늘날 여호와가 한국교회의 목자가 맞는가?

 

사사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며, 영웅 이야기도 아니다.

사사기는 오늘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오늘 아주 진지한 모습은 한국교회의 목자가 누구인지, 우리 교회의 목자는 누구인지, 나의 목자는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으로 고민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한분 한분의 마음에 주님의 놀라운 응답이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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