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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삼손의 마지막 (사사기 16:23~31)

by TwoTalents 2020. 2. 13.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삼손의 마지막.

 

본문 : 사사기 16:23~31

23.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 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말씀 :

오늘 본문은 삼손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삼손의 삶을 정리하면서 믿음의 눈으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나눌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원수였던 삼손이었다.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대인이었다.

그런 그를 산채로 붙잡았으니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본문 23, 24.

 

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최고의 승리 앞에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에게 영광을 돌린다.

다곤은 물고기 신이란 주장이 있지만, 대체로 곡식의 신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이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단순히 삼손 하나를 사로잡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신인 다곤이 삼손의 신,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이겼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신이 여호와보다 훨씬 강하고, 다곤이 신 중의 신이라는 것.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머리를 깎아버리고 두 눈까지 빼버렸다.

삼손을 완전한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앞도 보지 못하는 삼손을 불러다가 조롱하며 즐거워한다.

블레셋의 잔혹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본문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블레셋 사람들은 망가진 삼손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완벽한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했던 삼손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단지 자신들의 장난감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손이 믿는 여호와도 전혀 두렵지 않다.

 

믿는 자의 잘못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가 되게 하면서, 전혀 두렵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교회 문 앞에 담배꽁초 버리는 일 하나도 조심스러워 했다.

교회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도둑이 들 일이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에서는 직접적인 일탈은 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교회 문을 잠가놔도 그거 문 따고 들어와서 도둑질한다.

이것이 세상이 더 악해졌기 때문인가?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믿는 사람들이 잘못 살았기 때문이다.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보니깐 하나님이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다.

믿는 인간들도 다 불법 저지르고, 악한 일 하면서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데에 온 힘을 쏟는다.

그래 놓고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다 했다고 떠들어 댄다.

자기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추악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그 웃긴 사람들이 믿는다는 하나님이 두렵겠는가?

 

이렇게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단순히 삼손이 혼자 감당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삼손은 머리가 다시 자라나는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억나는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기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후회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회개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삼손은 마지막을 준비하게 된다.

본문 26, 27.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완전히 패배한 삼손은 소년에게 부탁하여 지친 몸을 의지할 기둥을 찾게 된다.

그러는 중에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비웃는 수많은 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삼손이 있는 곳에는 지붕에만 삼천 명가량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은 적어도 4~5천 명 이상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상황에서 삼손은 여호와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게 된다.

본문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이것은 사사기에 기록된 삼손의 두 번째 기도이다.

기록에 없다고 해서 삼손이 하나님께 전혀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 아주 중요한 순간에 삼손이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첫 번째 기도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 직후였다.

그런데 승리 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다.

혼자서 힘을 너무 썼더니 목이 말랐는데 주위에 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목마름을 벗어나서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기도는 본문처럼 완전히 패배한 후의 드려졌다.

자신의 두 눈을 빼앗고 이렇게 조롱하는 블레셋을 향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삼손의 대표적인 두 번의 기도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기도였다.

엄밀히 따지면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이다.

어쨌든 삼손의 기도는 이루어진다.

본문 29, 30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자신이 간구했던 대로 두 눈을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손의 개인적 복수를 허락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복수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개인적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삼손을 사용하신 것이다.

사적인 삼손의 동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악한 블레셋을 공적으로 심판하신 것이다.

 

결국, 삼손은 자신의 바람대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된다.

본문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은 그가 시작한 곳에서 마지막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삼손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삼손은 20년 동안 사사로 지냈다고 성경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20년을 사사로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을 한차례도 완전하게 해방시키지 못했다.

삼손이 죽을 때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많았다는 말은 마지막의 사건이 엄청나고 놀라웠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살아생전 사사로써 성실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많은 여자를 만나고 그녀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

삼손 본인은 사랑이었을지 모르나 여성에게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 번이나 배신당한다.

거기다가 자녀도 없다.

삼손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을 제집 마냥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다.

힘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블레셋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사슬에 묶이고, 강제로 맷돌을 돌리는 신세 되어버렸다.

사자도 찢어 죽일 정도로 천하장사였고, 블레셋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건강으로만 보면 성경에서 원탑이다.

하지만, 두 눈은 빼앗기고, 소년의 손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삼손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감정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에게는 회개가 없었다.

자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조롱하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가 없다.

사사이면서도 마지막까지 개인적인 복수에 치우쳤고, 사적인 감정만을 앞세운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신약에서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3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의 선진들을 설명하다가 앞의 사람 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더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거기에 삼손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것 때문에 삼손을 향한 비판적인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신약성경인 히브리서에서, 그것도 믿음 장에서 삼손을 인정하는데, 그의 사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히브리서 11장의 원래 취지와도 맞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은 개개인의 업적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의도가 아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고 증거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우리의 선배들이 증거를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는 자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다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음 안에서 사용하시고, 그것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단순히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이 올려졌다고 해서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부족함은 물론 믿음의 성장과 과정 등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삼손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극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놀라운 능력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힘만 센 한 젊은이의 이야기다.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라는 공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자기 혼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속 좁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가 힘을 옳은 일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번 사랑에 실패했기 때문에.

자녀도 없었기 때문에.

두 눈을 빼앗기고 지하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만으로도 슬픈 일이지만, 삼손이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 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삼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엄청난 재력과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받을 만해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잘해서 주어진 것인 양 교만에 절어 있다.

지금 한국교회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 민족과 이 나라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기독교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 우리만을 위한 것들을 주장하고 있다.

머지않아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올 것만 같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제 그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깐 한 번의 무너짐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너진 삼손에게 다시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처럼, 무너진 한국교회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 역시 확신한다.

여기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의 모습이 어떠할 것이냐는 것이다.

여전히 큰 변화 없이, 개인의 복수만을 간구했던 삼손처럼 될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때는 진실로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전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에게 참된 회복이 허락될 것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참 감사하다.

요즘 한국교회에 정신 나간 목회자가 많이 보이는데.

그만큼 그들을 추종하는 이상한 성도들도 많이 있다.

신앙의 색깔, 정치적 성향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고, 자기 뜻에 동조하지 않으면 다 빨갱이고.

하나님도 까불면 자기 손에 죽을 수 있고, 자기 외에는 대한민국을 구원할 자가 없는.

이단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가르침이 강단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아멘 아멘울면서 화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한마음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부족한 종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귀 기울여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혹시나 제가 잘못 갈까 봐 기도해 주시고, 주님 안에서 함께 살아있을 수 있도록 간구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 한편의 설교를 위해 일주일을 고민하고, 이틀에 걸쳐 3~4권을 책을 참고하며, 다른 목회자들의 같은 본문 설교를 읽고, 몇 시간 동안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준비를 한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주 안에서 함께 살아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의 처음 마음을 지키자.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한국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날에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나아가,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 안에 바로 서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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