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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있으나 마나 한 삼손 (사사기 15:9~20)

by TwoTalents 2020. 2. 1.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있으나 마나 한 삼손.

 

본문 : 사사기 15:9~20

9.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 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4.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 서 떨어진지라

15.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 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말씀 :

지난주에는 제멋대로인 삼손을 살펴보았다.

삼손이 사사이면서도 민족이나 지파가 아닌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블레셋을 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오늘은 이런 삼손에게 블레셋이 다시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삼손의 놀라운 능력, 하지만 그 능력의 허망함에 대해 나누어 볼 것이다.

 

먼저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본문 9, 10.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고, 목숨을 빼앗은 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복수하려고 한다.

그런데 삼손에게 직접 덤비지 못하고, 애꿎은 유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힘이 센 삼손보다는 이미 블레셋에게 겁을 먹고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유다 사람들이 훨씬 다루기 수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다 지파 사람들의 반응이 희한하다.

본문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삼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삼손에게 몰려가서 블레셋에게 왜 그랬냐고 항의를 하는 것이다.

아니 이 인원이면 삼손과 연합해서 블레셋을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블레셋이 삼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확인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지금 유다는 블레셋에게 몸도 마음도 정신도 완전히 굴복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삼손만을 책망하고 있다.

그러면서 삼손을 잡아 블레셋에게 넘겨주겠다고 협박을 한다.

본문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에게 큰 손해를 입혔는데, 칭찬은 해주지 못할망정, 마치 죄인처럼 결박해서 블레셋에게 갖다 바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삼손이라도 자기 민족과의 분쟁은 싫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막 나갔던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민족과 직접적인 갈등은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단지 결박만 한다면 순순히 응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사기에 나와 있는 삼손의 기록 중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긍정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삼손의 이런 태도는 유다의 입장에서도 반가울 따름이다.

본문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삼손 한 명 잡으려고 삼 천명이나 몰려갔다.

그만큼 삼손의 힘을 이들도 잘 알고 있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자신들도 가능한 삼손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고 싶었을 텐데, 마침 삼손이 먼저 제안을 해주니깐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결박되어 나오는 삼손을 보고, 마치 전쟁에서 승리라도 한 듯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본문 14절 상반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본문에 소리 지를 때는 히브리어로 루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루아는 전쟁을 시작할 때 소리를 지르거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외치는 함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니깐 지금 수천 명 정도로 예상되는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 한 명과 전쟁을 치르려고 나아왔고, 그 한 명에게 승리했다고 좋아서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게 된다.

본문 14절 전체.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블레셋이 승리를 만끽하면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 그 시간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한 것이다.

삼손은 자신을 결박한 포승을 너무나 쉽게 끊어 버린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다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민감하다거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음을 나타내기 위해 나온 말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삼손이 발휘하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를 밝히려는 조치이다.

삼손의 힘은 결단코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삼손은 승리의 함성을 지른 블레셋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게 된다.

본문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죽은 지 얼마 안 된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여버린 것이다.

말이 천 명이지, 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모습은 아마도 지옥과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구약 시대에 소개되는 많은 전쟁은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범죄한 이방인을 향한 징계를 위한 목적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전쟁의 현상만으로 인간존중이나 잔인함에 대해 논할 수는 없다.

 

아무튼, 블레셋을 상대로 혼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둔 삼손이다.

삼손은 이 결과에 스스로 만족했던지 승리에 대해서 자축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문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아무리 적군이지만, 사람을 천 명이나 죽였는데, 그들의 시체를 한 더미, 두 더미 쌓았다고 흥얼거리고 있는 잔인한 삼손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 노래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이 노래에는 하나님이 없다.

삼손은 전쟁의 승리에 대해 자신만을 찬양하고, 자신만을 높이고 있다.

승리한 삼손에게 걷잡을 수 없는 교만이 엄습한 것이다.

거기다가 그 승리의 장소에 이름을 지어 주면서 자신의 승리를 기억하게 한다.

본문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라맛 레히턱뼈의 산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였다는 것을 기리는 것이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벧엘.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된 이름이 전혀 아니다.

이 승리에서 하나님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만 잘났고, 자기만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다음 절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급반전하게 된다.

본문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구조적으로도 18절은 이전 17절까지 말씀과 상당히 결을 달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17절과 18절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그것이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바로 다음에 나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좀 어색하지만, 본문대로 이어서 등장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이어진 사건이든, 시간이 지난 뒤의 기록이든, 이전까지 하나님이 있든지 없든지 자아도취에 빠져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삼손이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매우 아쉽다.

삼손이 여호와를 찾은 이유는 자신의 목마름 때문이었다.

지금 한창 갈증이 심한데 주위에 물이 없는 것이다.

목이 너무 텁텁해서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에 대한 본문까지의 기록 중에 삼손이 직접 여호와께 부르짖고 구하는 장면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손의 일생을 통틀어도 딱 두 번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그중 한 번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스라엘의 사사된 삼손이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딱 두 번 찾는데, 그중 한 번의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자기가 목말라서 죽겠다고 물 좀 달라고 떼쓰는, 지극해 개인적인 부르짖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고 물이 나 떠다 주세요

이런 느낌마저 들게 한다.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삼손의 간구에도 응답해 주신다.

본문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엔학고레라는 단어가 여기서 등장한다.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시설의 세미나실이나 도서관 등에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실상은 삼손의 구함이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리 긍정적인 상황에서 나온 명칭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 지명되어 능력까지 받은 삼손은 사사이면서도 그의 활동이 계속 개인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삼손의 개인적 성향을 확증하는 내용이 이어서 등장한다.

본문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이 사사로 사역한 시대를 짤막하게 소개한 글이다.

그런데 내용상으로 이런 식의 기록은 삼손이 유일하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사사는 길든 짧든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된다.

아니면 구원할 필요가 없는, 겉으로나마 평화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사들이 활동하는 기간에는 이스라엘이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다시 범죄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다시 회개하고 사사를 세우는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손의 기록은 다르다.

그가 사사로 있는 20년 동안 이스라엘은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삼손이 사사인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을 섬기고 그들의 통치를 받았던 것이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40년간 통치하는 동안 삼손은 20년이나 있으면서, 그저 국지적인 손해만을 끼칠 뿐,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진 못한 것이다.

이 부분은 삼손이 탄생하기 전에 천사가 이미 예언을 했었다.

삼손은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구원의 시작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예언대로 된 것이니, 삼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삼손은 지금까지 소개된 모든 사사들 중에서도 단연 능력이 출중한 사사였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장사는 더 이상 없다.

그가 제대로 된 신앙으로 열심을 내어 최선을 다했다면, 옷니엘처럼, 기드온처럼 이스라엘에 큰 승리와 함께 자유를 선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적인 일, 개인적인 이유,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자기 복수와 자기감정에 충실할 뿐이었다.

사사는 공적인 직분인데, 그것을 무시한 채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적인 일에만 집중한다면,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것이다.

삼손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비록 예언된 삼손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말씀 마무리.

오늘 삼손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사를 받은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나에게 있는 모든 것,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일상의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사회생활에서의 관계를 위해 나의 능력, 나의 달란트를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혹시나 그것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한다.

주된 것이 무엇이고, 부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설교 중에 말씀드린 적이 있다.

우리는 월화수목금토를 위해 주일을 안식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주일을 위해 월화수목금토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담임 사관은 목회자니깐 매일 매일 하나님을 위해 살고, 평신도는 주일에 열심히 예배만 잘 참석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9절을 통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내가 택하신 족속이며, 내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나라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개개인은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를 뿐,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조부교님께서 한마음으로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용실로 심방을 했었다.

그때, 부교님께서 고백하시기를 미용실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업이라고 생각해서 무리하게 돌 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 키우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벌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에 불편함이 없기 위해서, 그리고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미용실 일이 주어진 것이라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고백인데, 오늘날에는 특별한 고백이 되어버렸다.

한마음 신앙공동체에게 이런 고백이 너무 평범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모든 성도들이 다 이렇게 고백하고, 고백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그것으로 교회에서, 하나님 안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귀한 사역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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