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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가장 작은 여인 (사사기 19:1~30)

by TwoTalents 2020. 3. 11.

이미지 출처 - 국민일보 USA

제목 : 가장 작은 여인

 

본문 : 사사기 19:1~30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30.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말씀 :

오늘 본문은 한 레위인과 그의 첩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너무나 슬프면서도 분노를 유발하는 내용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극도로 타락한 이스라엘과 그러한 사회 속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작고 연약한 여인의 삶을 나눌 것이다.

 

먼저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본문 1절 상반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이제는 이 말이 사사기에서 어떤 암시를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뭔가 또 한 번의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본문 1, 2절을 전부 읽어 보겠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당시의 사회에서는 첩을 취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권장하신 사항은 결코 아니다.

특히 레위 인은 종교인인데, 그에게 첩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어쨌든 레위 인의 첩이 행음을 하고는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본문의 행음을 성적 잘못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의 행음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행음을 했던 것이 대항적인 행동이었음을 알게 하는 전치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깐 이 여성은 남편의 잘못에 맞대응해서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 된다.

쉽게 말하면, 남편이 때렸거나 욕을 했거나 했는데, 부인이 거기에 열 받아서 같이 욕을 하고는 짐 싸 들고 친정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레위 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여성이 떠났기 때문에 그녀를 달래려고 처가댁을 방문하게 된다.

본문 3, 4.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뒤에 내용을 보면 알게 되겠지만, 레위 인은 이 여인을 특별히 사랑해서 데리러 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부부싸움 뒤에 둘째 부인이 집을 나가버렸다는 사실이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딸을 다시 데리러 온 사위를 장인은 아주 기쁘게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의 관례대로 3일 동안 자신의 사위를 환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레위인의 장인은 3일이 지났음에도 사위가 떠나려는 것을 만류한다.

계속 대접할 테니 좀 더 머물기를 원했던 것이다.

장인이 왜 이렇게 레위인 사위를 잡아두려고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번에 다시 돌아가게 되면 자신의 딸과 잘살기를 바라는 접대성 환대가 아닌가 예상된다.

그런데 딸의 의견이나 생각은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환대로 인해 늦어버린 출발은 어처구니없게도 여인에 대한 비극의 단초가 되어버린다.

 

레위 인은 장인의 강권함으로 3일을 더 머물렀다가 6일째 되는 날 밤에 드디어 그곳을 출발하게 된다.

본문 10, 11.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아무래도 다음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은 늦게라도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출발이 늦어졌기 때문에 밤이 되어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밤에 이동한다는 것은 생명의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레위 인과 동행하던 종이 여부스 사람의 성에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의견을 내는 것이었다.

여부스 사람의 성은 오늘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부스는 그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었다.

정복하지 못해서 이방인의 거주지로 남아 있던 도시였다.

그렇다 보니 레위 인은 여부스 사람의 성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본문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레위 인으로서 정결함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의식과 형식만을 강조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레위 인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 나귀는 두 마리뿐이다.

사람은 레위 인, , 그의 첩 이렇게 세 명이다.

지금 한 명은 걸어가고 있다.

 

결국, 레위인이 원하는 대로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이르러서 거기서 유숙할 곳을 찾아보게 된다.

본문 13~15.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 도착해서 자신들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거리에 있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소중한 전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브아에서는 어느 누구도 레위인 일행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나그네를 대접하는 전통 따위는 그곳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레위인 일행은 예상과는 다르게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 16, 17.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이 노인은 자신도 기브아에서는 외지인이었다.

베냐민 자손이 살고 있는 곳에 에브라임 자손이면서도 함께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의 처지가 측은해 보였던 것으로 예상된다.

이 노인은 레위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다음, 자신의 집에서 묵을 것을 허락하게 된다.

본문 20, 21.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다행히도 레위인 일행은 에브라임 노인의 배려로 거리에서의 유숙을 면할 수 있게 되었고, 편안한 쉼을 제공받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는 급반전하게 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본문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레위인 일행이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동네 불량배들이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며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량배들은 노인의 집으로 들어간 레위인 일행을 찾아 그곳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는 지금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에브라임 노인을 협박한다.

불량배들이 원하는 것은 레위인과의 남색이었다.

이스라엘의 전통과 나그네 대접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노인은 레위인을 그저 내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 불량배들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본문 23, 24.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노인은 그들의 악행을 멈출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고 있다.

자신의 처녀인 딸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자신이 지금 보호하고자 하는 레위인, 그 레위인의 첩을 함께 내어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 두 여인에게 불량배들이 좋을 데로 행하라고 제안한다.

자신의 손님인 레위인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자신의 딸은 물론 남의 부인까지 자기 마음대로 내어놓겠다는 말인가?

레위인과는 달리,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레위인의 첩, 그리고 노인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량배들은 이런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레위인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렇게 밖에서 노인과 불량배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차마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본문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불량배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 사람이 즉 레위인이 자기 첩을 붙잡아다가 그 불량배들이 있는 밖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레위인은 자기 살겠다고, 자기 부인을 불량배들에게 던져 버렸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친정으로 떠나버린 부인을 직접 가서 달래고, 집으로 가는 길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부인을 자신이 살기 위한 방패 막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그래도 레위인을 조금 변호하는 이들은 본문 자기 첩그의 첩으로 번역하여 레위인이 아닌 노인이 불량배들에게 그 여인을 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브리어로 자기 첩그의 첩으로도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레위인이 그랬든지, 집주인인 노인이 그랬든지, 이 여인은 한 인격체로서 아무런 존중을 받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 시대의 전통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불합리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렇게 억지로 밖으로 밀려난 여인은 밤새도록 불량배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만다.

본문의 능욕하다라는 히브리어로 알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지나치게 하다’, ‘철저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불량배들은 레위인의 첩을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능욕했던 것이다.

영어 성경 버전 중에 리빙 바이블은 이 부분을 교대로 겁탈했다로 번역하고 있다.

밤에 붙잡힌 여인은 새벽이 되어서야 놓임을 받게 된다.

그녀는 가까스로 남편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본문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아마도 이곳까지 죽을힘을 다해 기어왔을 것이다.

지금, 이 지옥에서 그래도 그녀가 찾아갈 곳은 쓰레기 같은 남편이 있는 그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빌어먹을 남편은 여인을 찾지도 않았다.

부인이 깡패들에게 끌려갔는데도 밖으로 한번 나와보지 않았다.

동틀 때쯤에 여인이 돌아왔는데도 혹시나 내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깡패들이 여전히 밖에 있을까 봐 무서워서?

아내가 강간은 당하더라도 다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오게 되면 문을 두들겼을 것이라고 믿어서?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레위인은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그는 밤새 문을 꼭꼭 잠그고 숨어있다가 아침이 돼서야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 집 문을 열고 나오게 된 것이다.

본문 27, 28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문밖으로 나온 레위인은 문 앞에 엎드러져 있는 자신의 아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이제 일어나서 떠나가자고만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여인이 밤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지금 상태는 어떠한지, 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쓰러져있는지 이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떠나자고 말을 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여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내를 나귀에 싣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이 레위인은 죽은 아내를 상대로 엽기적인 일을 벌이게 된다.

본문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자기를 대신해서 능욕당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내이다.

이 아내를 위해 작은 묘지라도 마련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 시체를 마디마디 찍어 쪼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열두 조각으로.

그는 이렇게 조각난 아내의 시체를 이스라엘 사방에, 즉 열두 지파의 중심부에 보내 버렸던 것이다.

이 여인의 시체 조각을 받게 된 열두 지파는 이렇게 반응한다.

본문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레위인은 단지 시체 조각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누구의 시체이며, 무슨 일을 당했으며, 가해자가 누구인지 편지로 썼거나 보내는 자에게 전달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시체 조각과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지파의 대표들이 모여서 상의한 다음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11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민족 간의 비극이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레위인은 왜 이런 엽기행각을 벌인 것인가?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 아내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려고 이러는 것이었나?

앞선 그의 행동을 보아서는 그런 의도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불법이나 방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회개가 없다.

그저 자신을 욕보이려고 했던 기브아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을 향한 복수만을 생각했을 따름이다.

 

레위인의 장인은 자기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딸의 의견은 애초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브아에서 만난 에브라임 노인은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나그네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기 딸은 물론 남의 부인까지도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

기브아의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가 싫어하든지 말든지, 자기들의 성적 욕망을 채우고 보겠다는 것이다.

레위인은 그저 자기애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자기가 필요해서 첩을 다시 찾으려고 했다.

자기가 원하기 때문에 여부스가 아닌 기브아에서 머물려고 했다.

자기 살려고 아내를 불량배들 사이에 내 빌어 버렸다.

자기 자존심 상하니깐 자기 복수하려고, 능욕당한 아내의 시체를 열두 조각으로 내어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버렸다.

 

단지 나의 욕구, 나의 필요, 나의 자존심, 나의 명예만이 중요할 뿐이다.

능욕당했던 한 여인, 아비에게도,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불쌍한 여인, 심지어 처음 본 노인에게서도 존중받지 못한 이 작은 여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던 시대, 이런 시대가 바로 사사의 시대였다.

 

본문의 내용을 보다 보면 많이 닮아 있는 사건 하나가 떠 오른다.

그것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롯의 이야기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천사를 대접했던 롯의 이야기와 기브아에서 레위인을 대접했던 노인의 네러티브는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결말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레위인을 천사와 결부시킬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참지 못하시고 직접 불로 심판한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다.

그런데 본문의 기브아가 소돔과 고모라와 별반 다르지 않게 타락한 곳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곳도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셔야 할 정도로 죄악이 넘쳐났고, 의인 10명을 찾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타락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의 끝을 알 수 없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단지 이 모든 것의 문제를 왕이 없어서라고 일관되게 주장할 뿐이다.

그러면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떠들어 댄다.

자신들의 외침이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지 않겠다는 고백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사의 시대가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반대로 이 사사의 시대가 지금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오늘날 세상을 돌아보고, 교회를 살펴보고, 믿는 자라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보다 당연히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앞으로 2번의 사사기 설교가 남아 있다.

마지막까지 말씀에 집중하여서 사사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고 실천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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