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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0 친구의 외침

맛을 드러내야 한다.(마태복음 5:13~16)

by TwoTalents 2020. 3. 23.
이미지 출처 - 보건복지부 페이스북


제목 : 맛을 드러내야 한다.

본문 :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 :
오늘은 ‘맛을 드러내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아마도 본문으로 다뤄진 설교는 많이들 들으셨을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산상수훈 중에 팔복에 대한 가르침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팔복과 관련이 있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팔복은 하나님의 나라를 얘기하면서 제자들이 가져야 할 성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본문은 그러한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여야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하는 설교를 들어보면, 대부분 소금의 기능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깐 소금이 가지고 있는 정화기능이나, 부패방지기능 등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세상을 정화하고,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교훈적 설교를 많이 한다.
참 좋은 말이긴 하다.
개인의 묵상으로 본다면, 그것이 실천되기만 한다면 참으로 귀한 깨달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것과 본문의 원래 의미는 조금은 다른 내용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금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소금으로 인해 바닷물이 정화되고, 그것으로 지구의 환경이 균형을 이룬다든지, 아니면 소금을 뿌림으로 음식물의 부패를 막는다든지 하는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오늘의 본문은 소금의 맛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소금은 짠맛이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 13절 상반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이게 무슨 말인가?
소금의 맛은 짜야 하고 짠맛이 소금의 맛이라는 것이다.
소금과 비슷한 모양의 것들이 있다.
설탕 같은 경우는 보기만 해서는 거의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전문가라면 그냥 보고도 바로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을 봐야 그것이 소금인지 설탕인지 구분할 수가 있다.
하얀 가루가 있는데 그것을 맛보았더니 단맛이 난다.
그럼 그것은 설탕인 것이다.
같은 모양의 것이 짠맛이다.
그게 바로 소금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이 소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짠맛이냐 아니냐.’라는 것이다.
비슷한 모양이지만, 아니 똑같은 모양이라 할지라도 짠맛이 나야 소금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소금이 아닌 것이다.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면,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그것이 짠맛을 낸다면 그것은 소금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실제로 소금은 굵은 소금, 가는 소금, 맛소금, 흙 소금, 돌소금 등등 여러 모양의 것이 있다.
물론 인공적인 가공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소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맛이 짜기 때문이다.
그 맛이 짜다는 것이 소금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13절을 다시 읽어 보도록 하겠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인 짠맛.
만약 그 짠맛이 없어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더 이상 짜게 할 수 없게 된다.
소금의 역할은 짜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금은 아무런 쓸데가 없다.
단지 하얀 가루일 뿐이다.
밀가루라면 반죽이라도 하지, 소금은 그냥 물에 녹아버리기 때문에 반죽도 안 된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저 밖에 버려질 뿐이다.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단지 그것을 밟고 지나가게 될 뿐이다.
소금이 소금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그 맛이 짜야 한다.
그것이 소금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가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연마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소금이 되는 건 너희의 의지에 달려있다’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너희는 소금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우리는 소금이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짠맛이다.
세상의 소금인 우리에게는 짠맛이 있어야 한다.
소금인 우리에게 짠맛이 없다면, 아무런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믿는 우리는 짠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짠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잠시 뒤에 다시 나누도록 하겠다.

소금과 더불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빛이다.
빛이 무엇인가?
영어로는 Light, 한자로는 광, 빛광.
국어사전에는 빛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천체나 불, 인공적인 조명 또는 특수한 생물체 따위의, 스스로를 밝히는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자외선과 적외선도 포함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는가?
복잡한 말들은 다 접어두고, 어쨌든 빛은 밝은 것이다.
빛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가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도 소금과 마찬가지로 빛을 ‘어두움을 밝히는 빛처럼 흑암과 같은 세상을 빛과 같이 비추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그런 개인 묵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빛은 밝은 것이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빛이 밝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이 아닌 것이다.
1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잘 보이기 마련이다.”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또 표준 새번역 성경은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라고 번역한다.
잘 보인다는 말이다.
산 넘어있는 마을이나, 산 귀퉁이에 있는 마을, 저기 구석 틈에 파묻힌 마을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 위에, 산꼭대기에 있는 마을은 어디에서도 모두가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15절을 통해 빛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자 불을 밝혀 놓고, 그것을 상자로 가린다거나,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숨겨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간혹 있겠지만,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말고는….
그냥 불을 안 켜면 안 켰지, 켜진 불을 숨기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은 당연히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불의 빛이 방 전체에 잘 비칠 수 있는 곳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방안의 모든 사람에게 비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빛의 역할이고 정체성이다.
빛이 밝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이다.

믿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또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다.
역시 빛이 되어야 한다고, 되도록 노력하라고, 웬만하면 빛이 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빛 그 자체라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인 우리는 어떠해야 한다는 말인가?
보여야 하는 것이다.
숨겨지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쳐서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빛인데, 방 가운데서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비쳐야 하는데,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빛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

그럼 도대체 우리의 무엇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인가?
세상의 빛으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비춰야 할 것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그 모든 결론을 예수님께서는 16절을 통해 밝히고 계신다.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먼저 우리는 소금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누었다.
소금의 짠맛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함을 고백했다.
세상의 소금으로써의 짠맛을 예수님은 16절을 통해 그것이 ‘착한 행실’임을 밝히고 계신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착한 행실이 바로, 세상의 소금으로써 나타내야 할 우리의 짠맛인 것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착한 행실이 없다면, 세상의 소금이 아닌 것이다.
짜지 않는 그저 아무런 쓸데없는 하얀 가루일 뿐이다.
세상의 소금으로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짠맛인 착한 행실이고, 착한 행실이 있어야 세상의 소금인 것이다.

또한, 그 착한 행실을 빛과 같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비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믿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주님이 말씀하신 짠맛, 착한 행실을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알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지금 거들먹거리면서 적선하듯이 구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착한 일 한다고 생색내라는 것이 아니다.
이웃돕기 성금 내면서,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난 체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벌써 착한 행실이 아닌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진정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잡다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 영혼을 사랑하여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모습만으로도 믿지 않는 이들이 충분히 감동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 말이 정답이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든지, 내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거기에는 교만이 자리 잡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더이상 순수한 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정답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다 알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착한 행실 자체를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자들이 세상의 소금으로써 왜 착한 행실의 그 짠맛을 내고 있는지, 그 이유 또한 함께 알아야만 한다.
우리 착한 행실의 이유가 하나님이시고,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이시며,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시고, 사람들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행한 나를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철저히 가려져야 한다.
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나는 숨겨져야 한다.
그러나 내 짠맛의 근원인 하나님은 온 세상에 나타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의도적으로 준비한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가 제대로 판단하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였다.

2020년 상반기는 한국 교회 역사상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이다.
전쟁 중에도 변하지 않았던 모이는 예배가 각자 처소에서 드려지고 있다.
이것을 두고 사탄의 계략에 넘어갔다고, 정부가 의도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모이기를 강행하며, 악착같이 헌금을 거두고 있다.
영상으로 예배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좌파 교회라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예배를 강행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했더니, 교회를 망치는 사탄의 앞잡이라고 한다.

프로 스포츠도 무관중으로 경기를 치르다가 최근에는 그마저도 멈추었다.
학교는 개학도 못 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에서는 스포츠가 핍박받고, 배워야 하는 학생들을 핍박받고 있는 것인가?
모두가 동참하는 사회질서에 왜 교회는 스스로 예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모습을 세상의 빛과 소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모습이 세상을 향한 착한 행실이 맞는가?
교회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 같은가?

우리 교회 성도가 코로나에 걸릴 수 있는 문제다.
목회자가 그토록 사랑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했던 믿음의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 성도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전도의 대상자들 아닌가?
그들을 살리지는 못할망정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왜 코로나-19의 상황과 전쟁을 비교하고 있는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아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하나님이 욕을 들어먹고 있다.

오히려 이 시점에서 모이기를 강행하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착한 행실이 아닌 코로나를 세상에 전파하려고 안달을 하는 것인가?
왜? 사태를 점점 악화시켜서 모이는 예배가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도록 방해를 하는 것인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이 저주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루하루 힘겹게 미자립교회를 지키며, 모이는 예배가 멈춰진 예배당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분들에게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교회의 존립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교회들의 고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도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결단하여 사회질서에 동참하는 수많은 교회, 수많은 목회자들이 있다.
이분들을 축복하며, 한마음 가족들이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들어 사용하시어 세상의 빛과 같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착한 행실이 드러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자신만 알고 이기적인 삯꾼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 한국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날을 어서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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