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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0 친구의 외침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누가복음 7:18~23)

by TwoTalents 2020. 2. 26.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본문 : 누가복음 7:18~23

18.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 니

21.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 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말씀 :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주된 내용이다.

이 질문과 답변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삶 속에서의 판단 기준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본문의 시작에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등장한다.

본문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지금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륜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힌 상태이다.

그는 밖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수시로 방문해서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식이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가 많았다.

비록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던 사람이지만, 세례 요한 역시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메시아 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전통적인 메시아 관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와서 로마 정권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열두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세례 요한이니깐 이 정도까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뭔가 실질적인 변혁을 바랐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시켜 예수님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본문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본문의 오실 그이는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를 나타내는 말이다.

지금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놓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는 것을 경험했던 세례 요한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세례 요한의 생각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 갇히면서 세례 요한의 심령이 매우 약해졌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이 생긴 것이라고 얘기한다.

앞서 말한 대로 세례 요한도 전통적 메시아 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무조건 의심 때문에 질문을 했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분명히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다.

무작정 성공과 승리의 메시아만을 기다렸던 사람이 아니었다.

 

세례 요한은 약해진 마음속에서 그것을 다잡을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고, 제자들을 보내어 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질문을 했던 것이다.

어쩌면, 세례 요한은 이제 곧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사역과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들의 스승이 말했던 대로 예수님께 질문하게 된다.

본문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제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메시아임을 공표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승장구를 걱정했던 제자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을 자신 있게 가르쳤다.

본인은 신랑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세상에 전할 사람이 바로 자신의 제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시킨다는 것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 요한의 연약함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한 명의 스승으로서는 놀랍도록 위대한 스승임이 확인되는 것이라고 본다.

 

많은 리더들, 스승들이 가지는 문제 중의 하나가 자신이 틀린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틀린 것이 확인되었을 때도 수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이나, 주장, 사상, 가르침에 대해서 번복하는 것을 아주 부담스러워한다.

틀렸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다른 것으로 덮어 버리려고 한다.

말을 바꾸는 순간, 마치 자신의 권위가 떨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맞는 생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가르침이 틀린 것이 의심스러운데도 자기 권위 때문에 모른 척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는 가르치는 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제자를 사랑하지 않는 나쁜 스승에 지나지 않는다.

 

신호등은 파란 불일 때 건너야 한다.

그런데 어떤 스승이 그것을 잘못 알고 빨간불일 때 건너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하자.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스승은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잘못 가르친 것 같다는 정황을 느끼게 되었다.

자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맞는가?

당연히 진실을 먼저 확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확인된 진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시 가르쳐야 한다.

이 상황에서 자기 권위, 창피함 이런 거 따지고 있으면 안 된다.

?

잘못 배운 내 제자는 죽을 수도 있다.

스승의 말만 믿고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요단강을 건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진정으로 제자를 사랑하고, 그가 제대로 된 지식을 배우기 원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가르침이 틀릴 수도 있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이다.

 

지금 세례 요한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비롯한 자기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증거를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증거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진실로 놀라운 스승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신다.

요한복음 728절 상반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아무튼, 이렇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 때도 주님은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셨다.

본문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사역을 하고 계셨다.

당연히 사람들이 보기에 놀랄만한 이적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신의 사역을 보이시며 세례 요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본문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전했던 질문은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가 맞는지였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본문과 같이 대답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사야 355, 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예언은 메시아가 임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이적을 일으키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치유 사역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을 주목하라고 하신다.

병자들에게는 회복의 기쁨이 생기고 가난한 자에게는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눈에는 예수가 누구인 것 같으냐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물론 그의 제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말씀을 하신다.

본문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전통적인 메시아 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세례 요한을 위로하시며 결국 극복할 수 있을 것을 격려하시는 것이다.

 

오늘 내용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의 내용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신시켜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그에 대하여 예수님은 본문 22절의 대답을 하셨다.

본문 22절을 다시 읽어 보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셨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았던 그 사역을 자신이 메시아이신 증거로 내놓으셨다.

이 증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놀라운 이적이다.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의 눈을 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이을 걷게 하셨다.

하늘에서 내린 벌이라고 인식되었던 나병, 즉 한센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셨다.

청각장애인도 고치셨다.

거기다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기까지 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함으로 인해 희망이 없는 자들, 쓰러진 자들, 다시 일어날 힘이 없는 자들에게 천국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의 이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놀라운 능력이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는 다른 랍비와 서기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이는 메시아임이 분명한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에게 기쁨을 주셨다는 것이다.

모든 병자는 물론 가난한 자, 약한 자, 어떤 종류의 고통 받는 자라도 예수로 인해 회복되고 기쁨을 얻게 되었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는 자가 없고, 주님 때문에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의 확실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의미는 결국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애초에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약한 자를 향한 긍휼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이 실천되면서 자연스레 증명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아일 수밖에 없는 증거이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 공동체 여러분.

사랑을 행동하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증거하셨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증거.

당신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당연히 행동하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이 옳은 모습인가?

생명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해해줘야 하는 것인가?

 

다음 사진을 보겠다.

 

 

 

 

 

 

이 사람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들이고, 무서움도 없는 사람들인가?

어떤 모습이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가?

 

우한 교민들은 우리 국민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 그 놀라운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우리.

믿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어떤 것일까?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길 기도한다.

그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그 진리 안에서 제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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