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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울어도 소용없다. (사사기 2:1~5)

by TwoTalents 2019. 8. 2.

통곡의 벽(예루살렘) - 출처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울어도 소용없다.

 

본문 : 사사기 2:1~5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말씀 :

지난주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반응을 나눌 것이다.

 

본문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길갈은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동안부터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다.

후에는 사사기 20장을 통해 언약궤가 벧엘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오늘 본문 즈음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벧엘이 본문의 보김과 같은 곳으로 보고 있는데, 그 부분은 뒤에 다시 나누겠다.

 

어쨌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을 다시금 상기시키시고 계신다.

멀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약속.

가깝게는 모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대해 변하지 않는 약속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에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본문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세대를 거쳐 약속하셨고 확인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과 함께,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기 위한 조건을 언제나 말씀하셨다.

조건이라 표현했지만, 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 조건이 본문 2절에 간략하게 소개된 것이다.

이 땅의 주민, 즉 가나안 민족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어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가나안 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것은 그들과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맺지 말라는 것이다.

경제적 관계든, 교육적 관계든, 혈연적 관계든 아무런 관계를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 죽이든가 다 쫓아내든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단들을 헐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인가?

가나안 민족과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적 교류, 영적 교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의 제단을 싹 리모델링해서 잘 사용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멀쩡한 제단을 모두 부숴버리라는 것이다.

잔재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과 이방 종교에 대한 1%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것.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이 듣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못 들은 것이 아니고, 고의로 안 들은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 반문을 하신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내가 함께하고, 승리하게 하고, 다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데도 왜 말을 듣지 않은 것이냐고.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랬는가?

오늘 본문보다 앞선 내용을 나누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민족을 왜 완전하게 쫓아내지 않았는지를 나누었다.

왜 그랬는가? 욕심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이상의 것을 소유하고 싶었던 욕심.

마치 그것을 소유하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보다 더 부유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욕심.

그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듣지 않게 해 버린 것이다.

자기 배 채우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범죄를 행한 것이다.

재물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내팽개치고…….

신앙이 혼합되든지, 변질이 되든지 상관하지도 않고…….

 

그런데 이 범죄의 결과는 너무나도 무서운 것이었다.

본문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어라?

내가 쫓아내라고 했고, 도와주겠다고 했고, 이 말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그런데도 너네가 나의 명령을 무시해?

오냐,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결단코 그들을 너희가 완전히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것을 막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온전히 다 차지하지도 못하고, 타인과 나누어서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원주민들과 가나안 땅에서 함께 살아가기만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에서 함께 살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가시가 되리라는 것.

올무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방해 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

골칫거리, 문젯거리로 항상 이스라엘 민족의 근심이 될 것이라는 것.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나안 족속들과의 문제는 계속되었다.

그들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물론 그때마다 사사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하신다.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이기든 지든, 결국 수많은 생명이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고, 나라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이런 징계의 말씀에 이스라엘 민족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본문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리 높여서 눈물 흘리며 울게 된다.

본문의 운지라는 히브리어로 바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통곡하다, 애통하다, 한탄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

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책망에 가슴 아파하며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한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뒤이어 등장하는 5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이스라엘은 어떤 사건을 기억하거나 기념하기 위해서 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의 이름을 사건과 연관 지어 새롭게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사사기를 나누면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벧엘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벧엘의 원래 이름이 벧엘이 아니었다.

야곱이 형을 피해 삼촌 집으로 도망가다가 어떤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야곱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벧엘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오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책망에 자신들이 회개하며 눈물 흘렸던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벧엘의 이름을 보김으로 한 번 더 바꾼 것이다.

보김의 뜻은 통곡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스라엘 민족의 눈물, 그들의 회개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책망에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인가?

울어도 소용없다이다.

이 말은 제가 예전에 아이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그리고 요즘 가끔 하는 말이다.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안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잘못된 행동은 고치는 것이 결말이어야 한다.

그저 울기만 한다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교육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책망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잘못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회개했다.

회개의 사실을 잊지 않고자 벧엘의 이름을 보김으로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딱 이렇게까지만 한 것이다.

 

이 보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너무나도 빨리 자신들의 회개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회개 후에 그에 합당한 아무런 행동이 나타나질 않는다.

회개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 38절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결코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의 합당한같은 분량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100을 회개했으면, 그 후에 100에 걸맞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면.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회개, 회개의 완성이다.

제가 구원의 완성, 천국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회개도 마찬가지다.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이고 과정이다.

회개의 완성은 뉘우치고 난 뒤에 변화된 행동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하지 못했다.

온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다시 불순종의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또다시 받게 된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또 용서하시고, 그렇게 회복시켜 주시고.

그러다가 평안해지니깐 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반복의 역사가 바로 250~300년 정도의 사사 시대이다.

 

말씀 마무리.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금 예배 속에서 은혜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예배당 문을 나가면서 바로 범죄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했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반드시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회개는 그저 눈물 흘린다고, 펑펑 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성장이 없다.

똑같은 범죄의 패턴 속에서 아무런 발전과 성장 없이 반복만 될 뿐이다.

지난번에 100을 범죄하고 100을 회개했다면, 100에 합당한 행함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는 100이 아니라 90의 범죄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90에 대해 회개하고 90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 다음에는 80, 그다음은 70...

이런 과정에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성장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의 잘못 속에서 하나님께 눈물 뿌려 회개하는가?

잘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눈물 뿌리는 것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눈물에 합당한 열매, 실천, 행함이 드러나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회개하며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회개와 함께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나가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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