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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참된 승리(사사기 1:22~26)

by TwoTalents 2019. 7. 25.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참된 승리.

 

본문 : 사사기 1:22~26

22.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 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말씀 :

오늘은 요셉 가문에서 진행했던 정복 전쟁의 일부분을 나눌 것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인 참된 승리는 본문의 요셉 가문이 참된 승리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된 승리를 하지 못한 요셉 가문을 살피면서, 그렇다면 참된 승리가 무엇인지를 나누려고 한다.

 

본문 22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본 절에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 가문과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럼 이 전쟁은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승리에 좋지 못한 요소가 들어가게 된다.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에 이어서 요셉 가문도 전쟁을 치르러 벧엘을 올라가게 된다.

본문의 요셉 가문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의미하는 말이다.

실제 이 두 지파는 따로따로 땅의 분깃을 할당받았다.

그런데 유다, 시므온 연합군처럼 함께 연합하여서 벧엘을 치러 나아가게 된다.

 

벧엘은 너무 많이 들어본 도시일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9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에는 베이틴(Beitin)이라 불리고 있다.

본래의 이름은 루스’(23)이다.

야곱에 의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로 바뀌었다(28:16-19).

벧엘은 본래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땅(18:22)이다.

그런데 요셉 족속의 남쪽 경계선과도 서로 맞물려 있었다(16:1,2).

그래서 요셉 족속도 벧엘에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인들을 쫓아내려고 벧엘 정복에 나선 것이다.

벧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사사기 이후 왕정 시대 때,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전에 목회하던 교회에 입구로 들어오는 골목 앞에 술집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의 이름이 벧엘의 쉼터’였.

주인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아무튼, 본문은 이 벧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벧엘의 원래 이름이 루스라는 것이다.

루스떠나다’, ‘왜곡되다라는 뜻을 가진다.

 

요셉 가문이 이 '루스'라는 '벧엘'에 전쟁을 치르기 전에 정탐꾼을 보내게 된다.

이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낸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리고 정복과정을 살펴봐도 비슷해 보이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이 두 전쟁이 모양은 비슷해 보이는데,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루스로 들어간 정탐꾼이 마침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본문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정탐꾼은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그 사람에게 선대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은 정탐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도와준다.

본문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그 사람의 도움으로 실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리고 정탐꾼의 약속대로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은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한다.

이렇게만 보면 여리고 성의 라합과 같은 상황, 같은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전쟁은 앞서 밝혔듯이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혹시 여리고의 라합과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먼저 오늘 본문의 전쟁에서는 앞에서 읽은 내용대로 정탐꾼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쟁 때에는 라합이 먼저 정탐꾼에게 제안한다.

여호수아 29~12.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라합이 이스라엘의 소식을 들어보니깐,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을 돌아볼 때, 그 죄악이 창궐하여 회복할 수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라합이 먼저 정탐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여호와 앞에서 선대 해줄 것을 요구하고 증표를 달라고 말한 것이다.

 

라합은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깨달음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도왔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루스의 한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우연히 적군의 정탐꾼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탐꾼이 변절을 제안했을 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족을 배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명을 지키게 되었다.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영적 깨달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본문의 경우와 라합의 경우의 가장 큰 차이는.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선대를 받아 목숨을 지키고 난 후에, 아주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흡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태복음 15절과 6절 상반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합은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된다.

예수님의 육체적 조상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등장하는 단 5명의 여성, 그중에 이름이 거론된 4명 중에 한 사람이 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루스의 이 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애초에 이스라엘에 흡수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본문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루스의 한 사람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새롭게 성읍을 건축하고 자기들끼리만 살게 된다.

거기다가 자신들이 새로 건축한 성읍의 이름을 루스라고 해 버린다.

루스는 바로 자기가 민족을 배신하고 요셉 가문에 팔아넘겼던 자기 고향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민족을 배신하고 고향을 팔아먹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그곳에서의 일들을 지켜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전쟁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본문 첫 절인 22절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전쟁이라고 선언되어 졌다.

그런데 요셉 가문은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지도 않았다.

어설픈 흉내 내기로 여호수아를 따라 하더니.

라합 사건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 정탐꾼이 덥석 거래를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쫓아내야 할 대상과 말이다.

당장 승리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잊어버린 채 타협을 해 버린 것이다.

라합처럼 그가 먼저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도 아닌데, 그를 살려주겠다고 제안을 한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

루스를 정복했지만, 결국 정복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렸다.

?

새로운 루스가 생겨버린 것이다.

장소만 이동했을 뿐, 루스는 여전히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선대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바람에 쫓아내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사사기가 쓰여진 그때까지도 그곳이 '루스'라는 이름, '왜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버젓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후에 요셉 가문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실패가 일어나게 된다.

 

말씀 마무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 가문의 승리는 승리하였지만, 승리가 아니었다.

이긴 것 같은데, 그들은 전쟁에서 진 것이다.

루스는 자신들의 손에 벗어나 다시 번성하였고, 앞으로는 그곳을 침범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왜 이런 이상한 승리를 하게 되었는가?

요셉 가문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옛적에 승리하였던 경험을 더 신뢰하였다.

그래서 실제 승리하였던 그 방법을 모방했던 것이다.

나름의 전략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다.

다 쫓아내라고 했는데, 한 가족쯤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을 선대 하겠다고까지 약속을 해 버렸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사기를 나누면서 얘기했던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었나?

가나안 전쟁의 승리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적인 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 어떤 전략, 어떤 전술을 통해 승리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승리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진정한 승리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 가문은 승리의 요인을 어떠한 방법에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찾은 방법대로 행하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그것으로 완전한 승리는 고사하고, 정복한 땅이 다른 지역에서 되살아나는 패배를 맛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사역에서도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교회 사역이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눈에 보이는 결과가 말해 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느냐에 달린 것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것이 착하고 충성된 것이 아니다.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주님의 백성들은...

눈앞에 성공이 아니라, 그 과정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성공을 위한 어설픈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실패할지언정,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참된 승리, 참된 성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참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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