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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07 사사의 시대-사사기(I)

끝나지 않은 전쟁(사사기 1:1~7)

by TwoTalents 2019. 7. 15.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제목 : 끝나지 않은 전쟁

 

본문 : 사사기 1:1~7

1.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 노라 하시니라

3.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 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 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 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말씀 :

사사기는 여호수아 사후에서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기 전까지 약 34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왕이 없던 시절이었고,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시어 임시로 지도자 역할을 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의 범죄->심판->회개->회복의 반복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이 바로 사사기이다.

사사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죄성의 위험성이다.

나약한 인간은 범죄하게 되고, 그 범죄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난 뒤에도 또 죄를 범하는 악순환의 반복을 보여 준다.

앞으로 사사기를 통해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결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 말씀 제목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사사기의 첫 시작은 이렇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모세의 후계자이며, 가나안 정복의 기틀을 마련했던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안타깝게도 여호수아는 자신의 뒤를 이을 마땅한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다.

물론 제사장이 있고, 각 지파의 장로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대표성을 띠는 지도자는 더 이상 없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여호수아 살아생전에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많은 땅을 정복하였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땅이 남아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지도자 여호수아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나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는 것이다.

모세의 바람이 아니다.

여호수아의 욕망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던 주의 종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죽었다고 해서, 여호수아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멈추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가 바뀌거나 부서의 담당자가 교체되면 그전에 진행되는 모든 일이 다 바뀌어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 새로운 목회자의 목회방침에 맞게 바뀌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새로운 담당자가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할 부분이 필요 할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라면, 목회자나 담당자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의 뜻으로 행하는 일들이 주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람이 누구로 바뀌더라도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어쨌든 비록 여호수아가 죽었지만, 아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없는 상태에서 정복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은 모세가 없다.

여호수아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이들이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아마도 이스라엘은 우림과 둠밈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사용했던 일종의 주사위와 같은 도구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본문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직은 이스라엘 민족이 신앙이 멀쩡한 편이다.

그래서 유다 족속은 하나님의 응답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한 가지를 요구한다.

본문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전쟁의 선봉장으로 선택받은 자신들과 함께 시므온 족속이 전쟁에서 앞장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요구는 뜬금없는 요구가 아니다.

시므온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모세로부터 독자적인 분깃을 배분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가 받은 분깃 중에서 일부를 나누어 받아 그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므온이 그 땅을 함께 정복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 것이다.

유다 입장에서는 같은 곳에서 함께할 족속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고, 시므온의 입장에서는 정복한 땅에서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여기서 시므온도 유다처럼 이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숨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비록 유다의 곁가지에 붙어서 일부분을 얻게 될지언정, 하나님의 명령과 형제 유다의 요구를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전쟁의 결과가 어떠했을까?

본문 4, 5절은 이 전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유다와 시므온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마치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뜻임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복의 과정에서 유다와 시므온은 잔인하리만치 가나안 족속을 철저하게 도륙한다.

본문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아도니 베섹에서 베섹은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아도니는 애굽의 바로, 로마의 가이사처럼 왕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니깐 아도니 베섹은 베섹의 왕을 의미한다.

도망가는 베섹의 왕을 잡아다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버린다.

다시는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간혹 구약에 등장하는 이런 부분 때문에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잔인성을 말하곤 한다.

이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냐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하나님을 너무 편협한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만 고백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민족을 창조하신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하나님이시지만,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저들의 하나님이시다.

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동일하게 당신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내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실수와 잘못을 안타까워하시며 회개하는 자에게 위로와 용서를 하시지만.

범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철저하게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가나안 족속에게도 의미가 있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실행이다.

그러면서 이 전쟁은 가나안 족속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인 것이다.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린 아도니 베섹이 본문 7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 가나안 땅에서는 이미 자기들끼리 영토전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아도니 베섹이 한 일이다.

이전에 그가 먼저, 전쟁에서 진 왕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는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칠십 명이나 되는 왕들에게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당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아도니 베섹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으셨다고 고백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게 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이방신을 섬기며 악행을 저지르는 가나안 족속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징벌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무작정 잔인한 하나님으로 매도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이기주의에 의한 지나친 억측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모세도 없고, 여호수아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에게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 나의 원함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알 수 없는 의미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고 행하여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그 승리의 모습조차도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승리하고 하셨다면, 그것은 승리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신앙공동체 여러분.

사람을 보지 말자.

오직 주님을 바라보자.

사람을 의지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자.

이성으로만 판단하지 말자.

믿음과 함께 순종하자.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의 신앙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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