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부활절]어찌하여 우느냐?(요한복음 20:11-18)

by TwoTalents 2025. 4. 20.

 

 

제목 : 어찌하여 우느냐?

 

본문 : 요한복음ㄴ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 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 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 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 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 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말씀 :

할렐루야!!

2천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아침이다.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절기이다.

비교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저는 성탄절보다 부활절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만약에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다른 종교의 신들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천국을 향한 소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다.

특정 이단 종파나 사이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는다.

그래서 해마다 부활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고, 그것으로 삶의 목적을 정립한 사람이라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당연히 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써의 합당한 모습은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인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먼저 오늘 본문에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이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등장한다.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도 마리아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절친이었던 나사로의 작은 여동생의 이름도 마리아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누구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 이전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요한복음 201, 2.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20장의 첫 부분부터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다른 복음서에는 다른 마리아들도 부활 아침에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꼭 집어서 말하고 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거기서 예수님이 사라진 빈 무덤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 알린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고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정처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 내용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201절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빈 무덤을 알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니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다.

막달라는 출신 지역이고 마리아가 이름이다.

우리나라로 하면 안동댁’, ‘대구댁’, ‘익산댁정도 될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렸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주장이 1,400여 년 동안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녀가 창녀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도록 한 계기가 있다.

그것은 59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재위 590~604)의 설교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를 지은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를 회개한 창녀로 설교한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의 향유 부은 여성도 죄를 지은 여자라고만 말했을 뿐 매춘부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니깐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죄를 지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증거는 없고, 그 죄지은 여자의 죄가 매춘이라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나중에는 더 나아가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마저도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하였다.

어쨌든 앞서 밝혔듯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1969년에 교황청에서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철회했다.

 

2006년에 개봉되었던 영화 다빈치코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존재와 실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이었냐 가 영화를 풀어가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그보다 먼저 1988년에 나왔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신약 외경 중에 빌립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셨고, 자신이 세운 12명의 제자보다도 더 사랑한 인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을 정통 교단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정경을 통해서든, 외경을 통해서든, 아니면 전승을 통해서든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과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음은 알 수 있게 해 준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 귀신에 들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던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다.

그런 예수님을 막달라 마리아는 따르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고난받으실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몇몇 마리아가 끝까지 예수님을 길을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또한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시고 사흘이 되던 날,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결국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본문 11절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다른 제자들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러질 못하고 빈 무덤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서 있었다.

여기서 울며라는 말에 헬라어 성경에는 클라이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클라이오라는 말은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운다.’라는 뜻을 가진다.

대성통곡을 했다는 말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왜 이렇게 통곡하면서 슬피 울고 있는 것인가?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고쳐 주셨고, 또한 제자로 삼아주셨고, 항상 예뻐해 주셨던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만으로도 마리아에게는 생각하기 싫은 아픔이고 슬픔이다.

그 슬픈 감정을 한 사흘 지나 좀 추스르고, 예수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찾아왔다.

그런데 그나마 예수님의 시체마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

슬픔이 두 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지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과 그분의 시체가 없어져서 슬퍼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소리 내어 엉엉 대성통곡을 하고, 혹시나 해서 울면서 몸을 구부려 다시 무덤 안을 들여다보며 확인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리아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 당신이 당하셔야 할 고난을 말씀하셨다.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죽으셔야 함을 제자들에게 밝히셨다.

그리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 역시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머리가 나빠서 그 말씀을 잊어버린 것인지, 전혀 그 말씀에 관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209절을 보겠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허탈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간 제자들을 향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어도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그저 슬프고 억울할 뿐이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12, 13.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 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그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에 옮겨 놨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깐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을 거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리를 내면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그저 울 수밖에 없다.

없어진 예수님의 시체를 생각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다.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엉뚱한 생각만 할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부활을 모르니깐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인 줄 모르게 되었다.

본문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늘 언제나 따라다니면서 바라보았던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셨을까?

누군가 서 있는데 자세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너무 슬퍼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서 계신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예수님인 줄 모르게 되었다.

본문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 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겠는가?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마리아이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허투루 들었겠는가?

그런데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죽었다고 확신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확신으로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고 자시고의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 울고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인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동산지기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부활을 모르니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깐 이럴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마리아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마리아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자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이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도 모른 채 슬피 우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본문 16, 17.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마리아를 부르셨다.

마리아가 또다시 예수님을 동산지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이전같이 여자여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마리아야하고 확실하고 이름을 불러 주셨다.

그 부르심으로 인해 마리아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선생님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으로 자신이 살아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시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마리아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부활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믿게 된 마리아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본문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슬펐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때는 먼저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을 찾아간 것이다.

이제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찾아갔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제자들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주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하셨든 말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대로 전달하였다.

부활을 몰랐던 막달라 마리아는 슬프고, 절망했었고, 아픈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부활을 알고, 부활을 믿은 막달라 마리아는 기쁨으로 가득 찼고, 희망을 품고,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부활을 믿는가?

서두에 밝혔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혹시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당장 기도하며 부활을 확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마리아처럼 소리 내어서 엉엉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반드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나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렇다면 부활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다른 시선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삶이 전부이고, 죽으며 끝일 뿐이다.

하지만 믿는 자는 그렇지 않다.

이 땅의 삶은 준비하는 시간일 뿐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고,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믿는 자는 이 땅이 아닌 부활의 시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잠깐 헤어지는 시간이 많이 아쉬워서 눈물 흘릴 수는 있다.

하지만 부활을 믿기에 다시 만날 날을 확신하며 기대하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활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주님은 우릴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주님은 우릴 위해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을 믿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