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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어린이 주일]내 자녀를 살리려면...(여호수아 24:29-31)

by TwoTalents 2024. 5. 5.

 

제목 : 내 자녀를 살리려면...

 

본문 : 여호수아 24:29~31

29.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 더라

 

말씀 :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다룬 책이다.

모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위대한 용사 여호수아가 세워진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민족과 전쟁을 치르고 승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 바로 구약의 여호수아이다.

전통적으로 여호수아의 저자를 여호수아 본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 전체를 여호수아가 모두 기록했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여호수아 사후의 기록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 전체를 통해 가장 이질적인 성격을 보이는 부분이다.

그전까지의 기록에서는 여호수아가 살아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죽음 후에 일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부분 때문에 여호수아서의 저자가 여호수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여호수아의 대부분은 여호수아가 기록했고, 여호수아 사후 부분만 다른 사람에 의해 추가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여호수아가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 말고도 내용의 성격에서도 다른 면이 드러난다.

여호수아는 전체적으로 승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금씩 그곳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아이 성 전투와 같은 실패가 기록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이다.

결국, 아이 성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은 승리한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서는 여호수아가 죽기 바로 전까지 함께하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증표를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수아 2414, 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승리를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이스라엘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호수아 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대답하는 이스라엘이다.

여호수아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재차 질문한다.

여호수아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게 고백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당신들이 할 수 있겠는가를 재차 질문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확신하며 다시 한번 대답한다.

여호수아 24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대답하니깐 여호수아는 그렇다면 아예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을 율례와 법도로 정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를 남기자고 말한다.

여호수아 2425~27.

 

그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여호수아의 제안을 백성들도 옳게 여기고 좋게 생각하였다.

이렇게만 마무리된다면,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기로, 전쟁 승전기로,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웅기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늘의 본문이 등장하는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여호수아의 죽음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본문 31절 말씀이다.

본문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앞의 기록과 본문의 성격이 무엇이 다른지 알겠는가?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곧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아는 자들이 다 죽고 난 뒤에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여호수아 사후에 사사기에서는 배교하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바로 앞까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율례와 법도를 정하고, 책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돌까지 쌓아 올렸는데.

마지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로 여호수아는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이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첫 번째 의문점은 왜 하필 마지막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것이다.

왜 굳이 승리의 책인 여호수아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배교를 암시하는 글로 마무리하면서 분위기를 망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성경의 목적을 오해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 승전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

가나안 정복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내용이 있지만, 그것이 주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철저히 인간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 관점으로 보게 되면, 승리 후에 기록된 배교의 이야기가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관계적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얼마만큼이나 잘하고 있는가? 아니면 잘못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길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했고, 질 때는 또 어떠했냐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영웅담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31절 기록을 통해 여호수아를 읽게 될 믿음의 자손들에게 커다란 경각심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인간의 고백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철저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가나안 정복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냈다.

전 세계 어떤 민족도 체험하지 못했던 기적을 때마다 체험한 이스라엘이다.

그것으로 결단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증거까지 남겼던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그 고백과 결심이라는 것이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한 세대가 지나자마자 바로 하나님을 배신해 버린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허망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한다.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 주세요.”

그럼 내가 믿겠습니다.”

 

이런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다.

바로 그 당시에는 할렐루야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한다.

결단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처럼 고백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그럴 것만 같다.

그런데 그 믿음이 평생 갈 것 같은가?

인간의 죗성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질 않는다.

어제 놀라운 체험을 하고 믿음으로 나갔다가, 오늘 닥쳐온 고난에 힘들어하며, 내일 하나님을 저버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낚았던 베드로.

짧은 시간이지만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직접 보았던 베드로.

내가 주님과 같이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

그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했었다.

이토록 연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는 내가 그런 존재임을 주님 앞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예배하며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내가, 예배 후에 저 문을 나가면서 바로 넘어질 수도 있는 약한 존재임을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두 번째 의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놀라우신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단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증거를 남겼다.

그리고 실제로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

그런데 그 아들은 왜 그 모양이냐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자녀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냐는 것이다.

아니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목숨을 다해 섬기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데.

아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산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교육의 실패이다.

신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치열한 전쟁을 통해 그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했던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

삶 속에서의 치열함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체험하기에는 너무나 평화스러운 시대이다.

이럴 때, 나의 자녀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먼저 체험한 부모의 교육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실패한 것이다.

 

물론 자녀를 향한 신앙 교육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체험케 해주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제자들이야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주님을 믿기에 한층 수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안 계신다.

이제는 제자들의 입술만으로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그때에는 믿음을 가지기가 훨씬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게 되는 자들은 커다란 복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세대와는 달리 평화의 세대가 말로만 듣고 하나님을 체험하기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주님을 체험한 부모의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녀 향한 신앙 교육이 어떠했는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잠언 226절 말씀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정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학교 때문에, 시험 때문에, 대학 때문에.

마땅히 행해야 할 예배를 하지 않아도 슬쩍 모른 척하지 않았는가?

직장 때문에, 결혼 때문에, 사회관계 때문에.

마땅히 행해야 할 말씀 묵상을 멀리하는데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았는가?

 

여호수아서 24장 전체를 읽어보면,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내가 오직 주님만을 섬긴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내 자녀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내 아들이, 내 딸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믿음의 아빠, 엄마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빌립보 간수에게 했던 바울의 말 때문에 오해하고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가족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를 믿어야 산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면, 내 가족에게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주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전하고, 교회 나올 때까지 전하고, 주님을 믿을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내 그를 살리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심령 깊숙이 새겨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믿음의 선배들이 겪었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한 믿음을 인정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약해서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믿음을 반드시 우리 아이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우리 아이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진지하게 교육하고 가르쳐야 한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오히려 반감만 살 뿐이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뿐임을 교육해야 한다.

중학생만 되어도 많이 늦었다.

고등학생? 어렵다.

대학생? 부모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영유아 때, 초등학교 때, 이때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늙어도 주님을 떠나지 않게 된다.

 

주일에 예배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야 한다.

주일에 교회 빠지고, 그 시간에 시험공부를 해서 성적 오른 것을 기뻐하고 만족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하기 위해서 평소에 더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야 한다.

주일을 방해받지 않도록 평일에 밤새며 공부하게 해야 한다.

 

여러분 사회생활을 해보셔서 잘 알지 않는가?

직장인이 되면 반강제로 주일을 지키지 못할 일이 생기게 된다.

먹고 살아야 하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배하지 못할 때가 생긴단 말이다.

그런데 똑같이 이런 경우를 맞이해도 내 마음속에 예배를 향한 마음이 있어서 그것을 놓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것과 학생 때부터 예배에 자주 빠졌는데,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건 같은 모양이라도 믿음이 다른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자녀들을 살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살 수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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