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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7 절기

[종려주일] 호산나 (마가복음 11:1-11)

by TwoTalents 2024. 4. 7.

 

 

 

제목 : 호산나

 

본문 : 마가복음 11:1-11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말씀 : 

저는 20대 때 음악 선교 훈련팀에서 훈련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꽤 유명한 팀이었다.

그래서 전국에서 꽤 많은 청년들이 그 선교단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각종 사투리도 많이 듣게 되었다.

나는 부산이 고향이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부산 사투리를 사용했다.

그런데 사투리 때문에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서울에서 내려온 한 자매가 나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가 뭐라고 말해도 들은 체도 안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을 가지고도 나를 비웃듯이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이건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그러니깐 도대체 이 아가씨가 왜 그러는지 정말 궁금해졌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상했다.

그래서 참다 참다가 그 자매를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얼마 전까지 나랑 별문제 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냐?’

불만 있으면 말을 해봐라.’

 

그랬더니 그 자매가 굉장히 기가 찬 듯이 저를 보며 대답했다.

 

오빠랑 친하게 지냈는데.’

아무리 친하다지만 쌍욕을 들으면서까지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기 아빠 엄마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쌍욕을 왜 저에게 들어야 하느냐며 따지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쌍욕이라니??

저는 욕을 절대적으로 싫어한다.

욕뿐 아니라 비속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를 봐도 살인이나 노출 같은 외설에 대해서는 반감 없이 문화적 표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본다.

하지만 대사에 욕이 나오는 것은 문화적 시각으로도 거슬리고 불편하다.

그러니깐 죽일 놈, 나쁜 놈, 빌어먹을 놈, 싸가지 없는 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쌍욕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의 새끼에 비유하는 말이라던가, 남녀의 성기를 빗대어 하는 말 이런 거 말이다.

어쨌든 엄청 싫어한다.

그런데 내가 그런 욕을 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내가 욕을 엄청나게 싫어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자매에게 욕을 한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은연중에 했다면 실생활에서도 자주 욕을 해야 할 텐데.

당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내가 언제 너한테 욕을 했다는 거냐?’

내가 무슨 욕을 너에게 했는데?’

말을 좀 해봐라.’

 

그랬더니 이 자매가 그 욕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말하냐면서 어이없어하는 것이다.

입에 담기도 싫다는 말이다.

내가 무슨 욕을 했는지 알아야 사과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깐 빨리 얘기해 보라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그 자매가 이렇게 얘기했다.

오빠가 지난번에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야잇 가시나야!!’라고 말했잖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자기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그런 말을 한 것이냐 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나는 뻥~찔 수밖에 없었다.

가시나는 욕이 아니다.

아주 친한 여성을 다정스럽고 친근하게 부르는 경상도 사투리이다.

그 자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자매가 믿지 못했다.

그래서 선교단에 있는 다른 경상도 친구들에게 데리고 다니면서 가시나는 욕이 아닌 여자를 지칭하는 경상도 사투리임을 확인 시켜주었다.

그것도 친하고 신뢰하는 여성에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그제야 내 말을 믿었다.

그러면서 어쨌든 어감이 강해서 듣기 싫으니깐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경상도 사람이라면 아시겠지만, 누군가에게 가시나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를 수 있을 만큼 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제 딴에는 그 자매와 많이 친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 그랬고.

그래서 정감 넘치는 가시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자매 입장에서는 아닌 거죠.

그 자매도 나랑 많이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말을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듣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양이 드센 것이 쌍욕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깐 기분 나빠지면서, 자신이 우습게 보여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우스운 사람처럼 대했던 것이다.

같은 상황, 같은 말에서 서로가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이 완전히 달라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오해일 수도 있고, 소통의 부재일 수도 있으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편견이나 무지일 수도 있다.

 

실재 가시나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선미의 노래 가시나

가시나의 뜻 : 여자아이, 가는지를 물어보는 것, 꽃들(꽃다발), 가시버시(각시)

 

어쨌든 가시나라는 한 단어에 대해서 전혀 다른 해석이 서로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같은 말이나 같은 사건을 두고 쌍방의 해석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때만큼이나 답답할 때가 없다.

이런 경우는 대화도 잘 안된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같은 경우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한 단어를 놓고 전혀 다른 해석의 차이를 보인다.

같은 말인데 예수님의 생각과 환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단어는 바로 호산나라는 단어이다.

호산나는 오늘 본문에서만 2번 등장한다.

여러분도 호산나라는 단어는 엄청 많이 들어 보셨을 것이다.

찬양에도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그리고 오늘은 종려주일이라 거의 모든 교회의 말씀 본문에 호산나가 있을 것이다.

 

호산나의 뜻은 이제 우릴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지금 본문에 의하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릴 구원하소서.’라며 외치고 있는 것이다.

본문 9, 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예수님도 자신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계신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 자신이 구원자라는 것이다.

자 어떤가?

이렇게만 본다면 지금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에, 예수님과 예수님을 환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렇고,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렇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가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믿으며 다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호산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개념이 다르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호산나이제 우릴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원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에 대한 개념이 예수님과 사람들은 달랐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길 원하셨고, 그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

사람들도 어떤 상황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 구원에 대한 개념이 예수님과 사람들이 전혀 다르다.

 

지금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혁명의 지도자로서 환영하였다.

그가 흩어진 이스라엘의 힘을 모아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것으로 믿고 희망하고 있다.

그러니깐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 이 순간,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육체적 해방을 시켜주리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은 순간이 아닌 영원토록, 이스라엘뿐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로마로부터의 육체적 해방이 아닌 죄로 인한 사망으로부터의 영적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같은 구원, 같은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3여 년이나 같이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잘 몰랐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수많은 비유와 해석들, 천국과 구원에 대한 말씀, 십자가의 말씀을 나중에 성령이 임하시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잘못된 이해는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혁명의 메시아로 세웠던 사람들.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예수님께 겉옷까지 깔아드리면서 환영했던 사람들.

그런 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며칠 뒤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비난하고 외치게 된다.

여러분 이게 이해되시는가?

일요일에 저 사람은 왕이라고, 구원자라고, 환영한다고 종려 가지 흔들며 난리 난리를 부렸다.

그런데 금요일에 저 사람을 죽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말에 관해 전혀 다른 해석과 개념이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자기 자신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모든 가치를 쏟아부은 것.

이러한 것들이 영혼의 구원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로 인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다른가?

우리가 외치는 호산나는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호산나인가?

우리는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헛된 호산나를 외쳤던 그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이 허망한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분명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신 구원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 좀 힘들지만, 주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꿈을 꾸면서.

그러면서도 자신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이 보이는 차이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차이보다 더 위험한 차이이다.

 

오늘 본문에서의 차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구원의 개념 자체가 달랐다.

예수님의 소명과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고, 급기야 예수님을 향한 비난이 더욱 거셌던 것이다.

이렇게 확실히 구분되는 차이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냥 봐서는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말만 들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들어가 보면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순간이 아닌 영원을 위한 신앙이라고 말을 한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한다.

내 영혼의 구세주라고 찬양한다.

이 땅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오직 천국에 소망이 있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많은 교회가 구원을 얘기하면서 언제나 축복을, 복을 함께 이야기한다.

마치 구원과 축복이 분리된 것인 양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우리가 주님을 통해 구원받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깐 구원 자체가 바로 축복이다.

하지만 수많은 교회가, 수많은 성도들이 마치 다른 축복이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축복을 기대하며, 이 땅에서 받게 될 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짜 목회자들은 그것을 담보로 성도들의 헌신을 강요하고 있다.

자녀가 좋은 대학 가려면 새벽 기도하면서 작정 헌금 많이 내라고 말한다.

좋은 남자, 좋은 여자 만나려면 구체적으로 조건을 작성하고 헌금 많이 내라고 한다.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교회 예배 꼬박꼬박 참석하면서 헌금 많이 내라고 한다.

무당들이 굿하면서 복채 받아 가듯이 목회자들은 기도 해준다고 헌금 많이 내라고 한다.

 

진실로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성공시키시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게 아니다.

이 땅에서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란 말이다.

내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이 땅에서 내가 부자 되고, 내 자녀가 좋은 대학 가고, 하는 일마다 다 성공하고, 다른 사람 가게보다 내 가게가 더 잘되고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분명히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실제 깊은 내면의 생각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닌 척하지만, 결국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축복과는 전혀 다른 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렇게 주님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현대 교회의 실제 구원론, 축복론은 2천여 년 전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자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을 마무리.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좋은 휴일에 여기 나와 함께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고, 우리의 예배가 헛된 것이 아니게 되는 것 아닌가?

옛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바람대로 호산나를 외쳤다.

어떻게 무슨 구원을 받는지도 모르면서 구원해 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한다.

단순히 지금 한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망에서 외치는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호산나는 영원을 준비하는 호산나여야 한다.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호산나여야 한다.

천국을 기대하며 영혼의 안식처를 바라는 호산나여야 한다.

그렇게 외치는 호산나가 주께서 원하시는 호산나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우리의 호산나가 이런 호산나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저 내 욕구를 위해 외쳐지는 호산나가 아니길 기도한다.

우리가 외치는 참된 호산나를 주께서 들으시고, 진리의 깊음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고 확신한다.

다른 무엇보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 그 사실 자체가 바로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진리를 기억하는 우리이길,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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