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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61 베드로, 성장을 논하다-베드로후서(I)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가짜들...(베드로후서 2:10-22)

by TwoTalents 2024. 3. 10.

 

 

제목 :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가짜들...

 

본문 : 베드로후서 2:10~22

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 들을 비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말씀 :

지난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 안에, 즉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될 가짜들,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거짓 선생들이 어떤 일을 할 것이며,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 안에 있는 그 가짜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전하였다.

우리는 지난 말씀을 통해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부르는 그들 말고.

정통 교단이라고 인정되면서도 이단이나 사이비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니 어느 때에는 이단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 가짜들의 위험성이 너무나 심각하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본문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계속해서 가짜들을 설명하고 있다.

거짓 선생들이 어떤 습성을 가졌으며,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가짜들의 위험성을 가르친다.

 

먼저 가짜들은 교회 안에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권력이 공인된 힘이라면, 권위는 내가 인정하는 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본문 10, 11.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에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이라고 표현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성적 문란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범죄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성적인 문란함에 빠져있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으며,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백 퍼센트 가짜이다.

그런데 이런 가짜들이 어쩐다는 말인가?

이런 가짜들이 주관하는 이를 멸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주관하는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가장 먼저 하나님이시다.

주관하시는 이, 완전한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교회에 전하는 영적 리더들이다.

그런데 가짜들은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주께서 세우신 사역자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권위를 멸시한다는 것이다.

옳은 말을 하며, 바른 가르침을 전하여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듣기 거북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방해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분명히 말한다.

그 가짜보다 훨씬 더 영적인고, 능력을 갖춘 천사도 주님의 권위를, 주가 세우신 종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짜들의 교만함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자기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가 가장 높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참된 권위를 비방하고 거스르는 이들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들이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본문 12~14.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무지하다고 말한다.

동물에게는 이성이 없다.

본능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능대로 배고프면 먹고, 먹은 것은 소화시켜 배설하고, 자기가 설정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할 뿐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짜들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이들은 본능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면서, 그 과정에서 행위가 불의해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타인은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불이익을 당하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은 교회 속에서 성도와의 교제마저도 자신의 탐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해 버린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런 가짜들을 향해 저주의 자식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이 가짜들을 구약에 등장하는 거짓 선지자 발람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본문 15, 16.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발람은 민수기에 등장하는 선지자이다.

민수기 225~7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발람이 모압왕 발락의 요청을 받아서 그에게 가게 되는 일을 말하고 있다.

모압왕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길 부탁한다.

이 요청에 발람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일방적인 저주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결국은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락에게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발람이 타고 다녔던 나귀가 막으려 했었다.

그 일로 인해 발람에게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발락에게 가게 된다.

비록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도 발람이 발락에게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

이처럼 가짜들은 선함을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된다.

 

베드로는 가짜들, 거짓 선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본문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물이 없는 샘을 진정한 샘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다.

이름만 샘일 뿐 실상은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구덩이일 뿐이다.

이렇듯 거짓 선생들, 가짜들은 물 없는 샘처럼 사람들에게 무익하고, 바람에 밀려날 안개처럼 일시적인 존재들이다.

가짜들에게 준비 되어있는 것은 캄캄한 어둠의 형벌뿐이다.

 

이 어리석은 가짜들은 자기 죽는 길인 줄도 모르고 언제라도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한다.

본문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가짜들은 간신히 위기를 피해 하나님께로 온 사람을 다시 넘어트린다.

그럴듯한 말로 미혹하면서 어렵게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을 또다시 안 좋은 상태로 이끌어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가짜들의 특징은 허탄한 자랑질을 하며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의미 없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소리를 떠들어 댄다.

회개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니깐 어떤 잘못도 다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근거 없고, 대책도 없는 긍정을 전하며 사람의 마음을 죄에 대해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무뎌진 심령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주시는 찔림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한 찔림이 없다면, 회개는 있을 수 없다.

회개가 없다면, 다시 죄악 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짜들, 거짓 선생들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도 모르는 자들이다.

본문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가짜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방종일 뿐이고 멸망의 길일 뿐이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멸망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이미 죄에 대해 패배한 자들이다.

그렇기에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가짜들이 처음부터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믿음을 저버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 돌아가 버린 최악의 경우가 되어버렸다.

본문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세속의 더러움을 피했다가 다시 죄 중에 얽매이게 되는 것은 최악의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처음보다 훨씬 안 좋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짜들은 이렇게 되어버린 자들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상황에 대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주님을 알고 영접한 후에, 또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은 처음보다 더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보다 더 강력하고 위험한 유혹에 넘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아예 의의 도를 몰랐으면 더 나을 뻔했다고 탄식한다.

본문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애초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예 몰랐을 때보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

모르면 배울 수 있다.

스스로 배우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으면 그대로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본인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깐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상황을 개가 토한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누운 것과 같다고 말한다.

본문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몰랐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다면.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로 들어가는 돼지와 같은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영혼이다.

지금까지 진리의 믿음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돌아오는 것이 더 어려워져 버렸다.

가짜들, 거짓 선생들이 이런 자들이다.

그리고 이 가짜들은 성도들도 그렇게 되도록, 자신들과 똑같이 더 나쁜 상태가 되도록 미혹하고 넘어트린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믿음은 주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죄 씻음을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이후에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영적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어떤 유혹이 와도, 어떤 시험이 와도 주를 향한 믿음을 온전히 지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주님을 몰랐을 때로 다시 돌아가는, 처음보다 훨씬 나쁜 영적 상태가 되어버리는, 그렇게 거짓 선생이 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위험한 것은 그 거짓 선생들은 여전히 진짜인 척을 한다는 것이다.

진짜인 척하면서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는 성도들, 내 앞으로 다가오는 그가 거짓 선생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는 성도를 미혹하는 혀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제목처럼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말이다.

 

가짜들은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들을 집어삼키려고 몸을 움츠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거짓 선생들의 허탄한 자랑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믿는 자들에게는 지속적인 주님과의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매일 매일 그날의 만나와 같은 말씀이 필요하고, 호흡과 같은 기도가 필요하며, 영혼에 안식을 주는 예배가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자.

주님께 계속해서 기도하자.

하루하루의 삶이 주와 동행하며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 참된 삶의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해서 나를, 우리를 거짓 선생들의 미혹 속에서 굳건히 지켜 내자.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사람이교회 한 사람, 한 사람을 주께서 굳건하게 지키시고, 끝까지 인도하시길 믿고 확신한다.

우리 모두가 참된 선생으로 바로 서고, 그 참됨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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