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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28 고멜을 사랑한 호세아(호세아)

회개 같지 않은 회개.(호세아 6:1-11)

by TwoTalents 2024. 1. 15.

 

제목 : 회개 같지 않은 회개

 

본문 : 호세아 6:1~11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말씀 :

오늘 본문인 호세아 6장은 호세아의 주제와도 같은 부분이다.

호세아 전체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 함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호세아 5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 외면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하셨다.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하신다.

오늘 본문인 6장에 들어서는 주님의 기대대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6장 전체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한탄이었다.

그 이유는 제목에서도 밝혔듯이 이스라엘이 회개 같지 않은 회개를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불성실한 회개로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했던 것이다.

 

일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고백한다.

본문 1, 2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부분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지자 호세아의 권고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앞뒤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5장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선포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일단 이스라엘은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확신에 차 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주께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과거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범죄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늘 변함없이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던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당연히 회개하는 자신들을 빠르게 회복시키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또한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고백한다.

본문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에서 고난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말이다.

그냥 들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뭘 하다가 고백한다는 말이 결국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 돌아온 자신들을 새벽빛과 같이 어김없이 고치실 것이라 믿고 있다.

땅을 적시는 비처럼 반드시 자신들에게 임하실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 간의 관계에서 봤을 때,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무조건 용서하고 다 받아주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런 경우를 우리는 전문용어로 호구로 본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호구로 본 것이다.

호구가 무슨 말인지 다 알 것이다.

어수룩해서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을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호구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어수룩해서 속은 것이 아니라, 알지만 속아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말뿐인 이스라엘의 회개를 단호하게 비판하신다.

본문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 남북국 모두를 향해 이 인간들 어쩌면 좋으냐며 탄식하신다.

이스라엘의 인애가 맑은 날 사라지는 구름 같고, 아침이면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그들의 행동이 일회성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회개는 일시적인 것일 뿐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당장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고, 여호와를 알려고 힘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회복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 앞에서 또 범죄할 인간들이라는 말씀이다.

 

애초에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회개는 올바른 회개가 아니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스라엘의 회개에는 죄에 대한 고백이 빠져있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빠진 것이다.

그냥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힘써 알면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호구로 보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회개를 하고 있으니 이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주께서 한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회개를 난발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회복이 아닌 심판을 선포하신다.

본문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본문의 치고’, ‘죽였노니로 번역된 두 동사는 원어상 모두 완료형이다.

그러니깐 그들을 쳤고’, ‘그들을 죽였다가 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런 것을 예언자적 완료형이라고 말한다.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다시 한번 드러난다.

잘못된 회개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으로 회복을 기대했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불성실하고 잘못된 회개로 당신을 기만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는 것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호구의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주의 공의를 드러내며 빛처럼 임하시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회개로 자신을 기만한 이스라엘을 향해 분명하고도 명확한 당신의 뜻을 선포하신다.

본문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본문의 인애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다.

헤세드는 개역성경에서 문맥에 따라 인자, 인애, 은혜, 후대, 선대, 자비, 긍휼, 선한 일, 불쌍히 여김, 아름다움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니깐 헤세드는 삶에서 드러나는 믿는 자들의 성품이다.

인애, 즉 헤세드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제사와 같은 형식만을 지키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실제 삶에서 사랑하고, 베풀고. 나누며 사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이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번제를 올리면서 정작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번제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먼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번제의 방법이나 순서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번제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자신들을 돌이켜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 고백은 말뿐인 고백이었고, 일시적인 고백, 위기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고백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 진실하지 못한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삶에서 드러나는 사랑이며, 온 마음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애를 저버리고 여호와를 모르는 이들처럼 행하였던 이스라엘의 지난 모습을 지적하신다.

본문 7~9.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학자들 사이에는 본문의 아담을 창세기의 아담으로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 장소로 번역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어떤 번역이 맞든지 간에 하나님을 반역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길르앗과 세겜에서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드러났다.

종교적으로 권력을 가졌다는 이들에 의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약탈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의 삶을 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고난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회개만 있을 뿐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다.

본문 10, 11.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 더럽혀졌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로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올린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이 돌이키기를 기대하셨다.

이스라엘은 심판을 말씀하신 하나님께 회개하며 여호와께 돌아가겠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고백은 말뿐인 고백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말하고,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고백했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실행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그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자신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안쓰러운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회복이 아닌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러시면서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형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제사보다 중요한 것 무엇인지, 번제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셨다.

실제 삶에서 성도로써의 도리를 다하길 원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기대하셨다.

번제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말씀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와는 다른 모습인가?

죄를 지어도 형식처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지금 우리의 믿음과는 다른 믿음인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과 똑같은 모습으로 입술로만 회개하며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실제 삶의 변화는 없이 그저 입술의 고백만이 난무한다.

진정한 회개는 입술로 고백하고, 삶으로도 고백하는 것인데...

입술의 고백만 있을 뿐, 삶에서는 다음 회개를 위해 죄를 쌓아갈 뿐이다.

하지만 이런 회개는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실망하신 마음으로 내가 너희를 어떻게하랴?’라고 하시며 한탄하실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한국 교회를 향해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예배가 잘못되었기에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외침은 주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말씀일 뿐이다.

예배가 중요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예배 이전에 예배자가 있다.

예배 이전에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은 그저 예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먼저 원하신다.

예배하기 이전에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로 알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523,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예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나와 함께하시길 원하신다.

아니 함께하셔야만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예배 속에서만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전반을 통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렇기에 우리의 회개는, 고백은 예배 속에서 형식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회개가 삶에서 드러나고, 고백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이고,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회개가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입술로 죄를 고백하고, 삶으로 죄를 멀리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 제사보다 인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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