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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28 고멜을 사랑한 호세아(호세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부끄러운 일을 좋아한다.(호세아 4:11-19)

by TwoTalents 2023. 9. 10.

제목 :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부끄러운 일을 좋아한다.

 

본문 : 호세아 4:11~19

11.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13.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 은 망하리라

15.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16.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17.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18.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19.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말씀 :

호세아 일곱 번째 말씀.

오늘 말씀의 제목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부끄러운 일을 좋아한다.’이다.

지난 말씀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났다.

호세아 410.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을 버리고, 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포기했던 것인가?

오늘 본문에는 그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진실도, 인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진실도,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버리고 말았던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런 것이었다.

본문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이스라엘이 진실과 인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음행과 묵은 포도주, 새 포도주에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도 찾지 않았던 것이다.

향락과 욕망, 물질 만능에 빠져서는 헤어 나오질 못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음행과 묵은 포도주, 새 포도주는 모두 이교적 행위와 관련이 있다.

본문 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이 나무로 형상을 제작하여서 거기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직간접적인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만들어서 경배하지는 않는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랍시고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된다.

신명기 416~18.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다른 우상, 즉 바알이나 아세라 목상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영적 간음,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음란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의 음란한은 히브리어로 자눈이란 단어로 간통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이 간통을 저질렀다고 규정하시는 것이다.

영적 간음, 영적 간통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음행은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본문 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산꼭대기든, 작은 산 위에든 분향하기 좋은 곳에는 다 찾아가서 우상을 위한 제단을 만들고 거기에 분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참나무,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등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에서 이교적 행위를 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교적 행위에는 대부분 학자들이 음란한 성행위가 동반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나안에는 신전의 공창제도가 있었다.

남성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신전의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그런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이런 음란한 행위를 따라 했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이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여성들이 음행하고 간음을 저질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성들이 음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본문 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지금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고 제사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지는 음행이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가 이교도의 행위를 따라 하면서 간음하고 음행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음부는 히브리어로 카데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창기, 매춘부를 의미한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신전에서 일하는 매춘부를 의미한다.

남자들이 제단에 제물을 바치면서 매춘부와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지금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린다는 명분으로 남녀 할 것 없이 이스라엘 전체가 당당하게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밝혔듯이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갈 데까지 간 이스라엘을 향해 니 맘대로 해봐라는 것이다.

간음하고 음행하면서 점점 영적으로 타락하는 그들을 그냥 놔둬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이러고 있는데 부부 관계가 온전하겠는가?

가정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집안이 엉망진창인데다가 하나님도 두손 두발 다 드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망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나마 상태가 좀 나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에게 나쁜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신다.

본문 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본문은 번역 버전에 따라 뉘앙스가 좀 다르게 해석된다.

북이스라엘은 심각한 음행으로 하나님께서 포기하셨지만, 남유다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겠다라고 해석이 가능한 번역이 있는가 하면.

북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음행을 저질렀는데, 남유다에게는 나쁜 영향을 끼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한 번역이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어느 해석이 맞든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구분하고 계신 것만은 확실하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삶은 받쳐주지 않으면서 옛 추억에만 젖어있는 북이스라엘의 신앙을 비판하신다.

본문에 나타나는 길갈과 벧아웬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길갈은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유월절을 보냈던 곳이고, 한때 선지자 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벧아웬은 벧엘을 말한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축복받은 곳이 바로 이곳, 벧엘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두 곳에서 호세아 당시에는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다.

길갈에서의 제사는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렸던 벧엘은 벧아웬, 사악한 집’, ‘죄악의 집으로 불리게 될 정도였다.

이렇게 이미 변질되어 버렸는데.

성지 순례하듯이 이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냐는 것이다.

제사도 이교도적으로 변질되었고, 삶도 음행으로 가득한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말도 안 듣는 인간들인데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본문 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이스라엘이 황소고집이라는 말이다.

도대체가 말을 들어 먹질 않는 인간들이다.

그러니깐 어린 양에게 먹이듯이 먹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 안 듣는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본문 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말한다.

북이스라엘을 구성한 지파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였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에브라임을 대명사처럼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북이스라엘이 우상과 연합하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간음하고 음행하는 것을 그냥 놔둬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냥 포기하시고 그들을 죄악 가운데 그대로 유기해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 유기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했었다.

마지막 심판,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가장 무겁고 무서운 징계가 저는 하나님의 유기, 내버려 두심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책망도 교훈도 위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당근도 없고 채찍도 없이, 죄를 짓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는 상관없고 남남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회복의 방법도 기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확정된 심판을 받을 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

그들은 이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본문 18.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멈추지 않고,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런 중에도 이스라엘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아니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그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최소한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가책이 아니라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죄를 저지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사이코패스이지 않은가?

이스라엘이 미친 것이다.

본문 18절의 두 번째 그들을 개역 한글 버전에서는 방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니깐 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글 번역 버전에서도 지도자, 관료, 대신 등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이 악을 저지르고 음행을 행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미친 것이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본문 19.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그들의 즐거움은 바람에 쓸려 사라지듯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쳤던 제물로 인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제물을 올렸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교도의 모습이나 따라 하면서 음란하게 변질된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된 많은 제사와 바쳐진 제물로 인해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당당히 행하였는지를 증명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워했던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진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는 어떠한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겉으로 보이는 것은 너무나 화려하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시각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런 발전이 곧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23~2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셨다.

혹시라도 화해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예물을 내려놓고 형제와 갈등을 먼저 해소하고 그다음에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배하려는 자들이 불법을 저질러서 그것 때문에 재판이 열리고, 자신의 범죄로 인해 법적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배 전에 이웃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아니 예배를 핑계로 세상과 맞짱을 뜨려고 한다.

세상의 사람들이 세속의 가치로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똑같이 저지르고 있다.

아니 더 심하게, 더 치졸하게 불법을 행한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지 세상 법과는 상관이 없다는 헛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마치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양 이분화를 해버린다.

그런 마음으로, 그런 영적 상태로 올려지는 예배가 제대로 된 예배이겠는가?

부끄러움도 모른 채, 불법을 저지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아무리 많은 예배가 이루어지면 무엇 하는가?

하나님께서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보기 싫어서 눈을 막아버리시는데.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인간이면서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귀한 마음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내가 범죄하고, 내가 세속의 욕심부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내 속에 심어진 믿음의 양심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그 부끄러움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 회개함으로 죄에서 돌이키면서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 부끄러움을 상실해 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 기뻐하기까지 한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 만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부끄러운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믿음의 사람인 우리는 그 누구보다 부끄러움에 민감해야 한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죄에 대해 점점 무뎌지는 세상 속에서 더 민감한 모습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뎌진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고 진리가 되어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작은 잘못에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부끄러운 일을 멈추기 위해 주님 앞에 간구하며 나아가는 우리이길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회개하고 반복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결코 부끄러운 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는 우리이길.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이길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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