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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두 마음은 없다. (야고보서 4:1-10)

by TwoTalents 2023. 9. 24.

제목 : 두 마음은 없다.

 

본문 : 야고보서 4:1~10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말씀 :

많은 학자들이 오늘 본문을 야고보서의 중심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고백한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 공존할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 야고보 장로는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부분은 여전히 잘못 전달되거나, 왜곡해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성공과 하나님의 축복이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나아가고, 그 일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해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참된 지혜를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가장 먼저 야고보 장로는 싸움다툼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문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본문의 싸움은 전쟁과 같은 큰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툼은 개인의 충돌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야고보는 크고 작은 모든 갈등의 원인이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정욕은 부족한 것, 나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문의 정욕은 헬라어로 헤도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쾌락을 추구하고, 그것이 목적임을 의미한다.

모자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도 더 갖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니깐 세속적인 욕심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싸움과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심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을 경고한다.

본문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지금 야고보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교회가, 성도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못해서 살인하고, 시기했다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앞에서도 이런 상황을 경고했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욕심 때문에 나도 죽고,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해봤자 헛수고라는 것이다.

아무리 불법을 저지르면서 별짓을 다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들의 원함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에 대해 야고보 장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야고보가 말하는 이들은 도대체 뭘 얻고자 했고, 뭘 구하지 못했을까?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을 얻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기 욕심, 자기 욕망, 자기 쾌락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2절에서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3절에서는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 자기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옳은 것은 구하지 않았고, 자기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욕, 욕심을 따라 얻고자 하는 것을 무조건 얻지 못하던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욕심을 미화시켜서 하나님께 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쾌락을 위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구하면서 기도랍시고 했는데, 마치 그것이 응답받은 것처럼 그에게 주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야고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야고보가 현실을 잘 모르고, 믿음 안에서 뜬구름만 잡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잘못 구하는 이들이 무엇을 구했는가?

자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였다.

자기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이것저것 다 구해보고, 그러다가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정욕이라는 것은 채워도 채워도 안 채워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누려도 만족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진 것으로 순간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만족, 쾌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과 같아서 완전히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구하여도 만족할 만큼 얻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정욕을 채워서 만족을 얻으려는 이들을 향해 세상과 벗 된 이들이라고 맹비난을 한다.

본문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정욕을 좇는 자들을 향해서 간음한 여인이라고 질타한다.

그들은 세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자기 정욕을 채우려는 것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본문에서는 세상과 친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세상을 통치하는 사탄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가치와 바람을 내가 따르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칭찬받으며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신앙인으로 잘살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기복신앙을 세련되게 교묘히 위장한 소위 성공신학, 번영신학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야말로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리숙한 생각일 뿐이다.

아니면 아직 믿음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 몰라서 착각하여 떠들어대는 수준 낮은 소리일 뿐이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결코, 어리숙하거나 약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잘 지키며 세상에서도 누릴 것 다 누리도록, 사탄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만큼이나 잘 아는 존재가 바로, 사탄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던 최초의 인간을 말로써 미혹시킨 능력의 소유자가 사탄이다.

아담과 하와가 부족한 것이 있었는가?

그들은 부족해서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풍족한 것이 그들을 망쳐 버렸다.

더 누리고, 더 높아지려다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안 되고, 풍족하게 살았어도 안 된다는 말인가?

그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의 성공 여부와 제물이 풍족한 것의 수준은 믿음의 영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말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그런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며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세상에서의 성공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구하지도 않고, 자신의 정욕만을 채우기 원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보다 성공을 더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혹시 성공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저버린다면, 그야말로 세속의 친구가 된 최악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자들이 바로 교만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다.

지금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물리치신다.

본문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더 깊은 깨달음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이 겸손한 자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주문한다.

본문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앞서서 언급했던 세상과 벗 된 자들은 자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그들이 오히려 피하여 도망하게 될 것을 전한다.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과 가까이할 것을 명령한다.

본문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바로 말씀과 기도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주님과 대화하며 나누게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심으로 우리와 가까이하시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가까이하면서, 손을 깨끗하게 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전한다.

손을 씻는다는 것은 원래 제의적인 의미이다.

제사를 올리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을 먼저 깨끗하게 하려고 손을 씻었다.

그러니깐 하나님을 가까이하면서 나의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깨끗해야 한다.

본문의 두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두 마음을 품은 것이 성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깊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고, 그러면서 세상에서 성공해서 사람들에게도 칭찬받고 싶고.

이런 마음이 성결한 마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칭찬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께 칭찬받기를 소원하면서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았더니.

그렇게 했더니 자연스럽게 세상이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처럼 믿는 이들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하나의 마음으로 성결함을 지켜야 한다.

 

이제 야고보 장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두 마음을 품은 이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한다.

본문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향한 마음을 온전하게 버리지 못한 이들은 그 세상을 통해 자신의 정욕을 채워왔다.

채워지지도 않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결단코 정결한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두 마음을 품었던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눈물로서 회개하여야 한다.

짧은 시간이었더라도 세상을 통해 얻었던 즐거움들이 있다면, 그것이 주안에서 근심임을 깨닫고 아파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다.

하지만 세상 쾌락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다면, 주와 함께하는 참된 만족을 깨달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야고보 장로는 두 마음을 품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본문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인간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실 때이다.

세상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높아지는 것은 순간이며 허상일 뿐이다.

나의 구원과 영생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아무짝에 쓸데없는 자기 욕망, 자기만족, 자기 정욕일 뿐이다.

오직 주님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든지,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든지 그런 것은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고 겸손히 무릎 꿇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믿음을 보시고 나를 높이신다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오늘 야고보 장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두 마음을 말하였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그런데 이 두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비율에 따라 좀 더 비율이 높은 쪽의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니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65% 정도이고, 세상을 향한 마음이 45% 정도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5050이든, 9010이든 그저 두 마음이다.

그리고 이 두 마음은 성결한 마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비율이든지 두 마음을 품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그냥 세상과 벗 된 사람인 것이고, 그 마음은 그저 세상을 향한 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두 마음은 없다이다.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것이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 세상을 향한 욕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만큼 완전히 욕심을 버리는 것이 인간에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장로는 매일매일 주님과 가까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말씀을 읽고, 날마다 기도하고, 언제나 주의 뜻을 구하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서 어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다짐하라는 것이다.

주님을 영접했을 때의 은혜는 영원한 것이다.

그 은혜 자체는 영원한 것이지만, 그 은혜를 의지하는 인간은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오늘은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말씀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겸손함으로 주님과 가까이하는 자에게 오늘 크신 은혜를 깨닫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매일매일이 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주의 크신 은혜로 시작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두 마음을 주는 사탄의 계략을 물리칠 수 있는 우리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오직 주님을 향한 한마음으로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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