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믿음은 동사입니다.(야고보서 2:14~26)

by TwoTalents 2023. 9. 3.

 

제목 : 믿음은 동사입니다.

 

본문 : 야고보서 2:14~26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 :

야고보서 일곱 번째 말씀.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신약성경 중에서 행함, 즉 실천에 대해서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와는 상충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 때문에 종교개혁의 시작을 열었던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해서만은 가짜 복음이라고 폄훼하며 정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었다.

어쨌든 저는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야고보서가 정경으로 포함되어 지금까지 읽혀지고 있는 것을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칫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 있었던 우리의 믿음이 야고보서의 메시지로 인해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바로 오늘날, 20239월을 시작하는 대한민국 교회 안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하고 감히 단언해 본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의 한탄으로 시작된다.

야고보의 한탄은 나는 믿음이 있노라라고 말하는 자는 많은데, 진짜 산 믿음을 소유한 자는 적더라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진정한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오늘은 이 질문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려고 한다.

 

야고보의 한탄과 책망은 이런 것이다.

본문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지금 이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는 어떤 사람의 주장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의 자기주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 있노라라는 것이다.

본문의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

현대어 성경은 이 사람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 한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말뿐인 사람이었다.

지금 야고보 장로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에 합당한 행함이 없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야고보가 언급하고 있는 본문의 사람은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할 뿐행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믿음이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믿음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진단이다.

그러니깐 나는 믿음이 깊다’, ‘나는 믿음의 수준이 높다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입증되지 않기에그의 믿음은 위선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입으로만 떠벌리는 믿음이다.

행함과는 동떨어진 죽은 믿음이다.

 

역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집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장로는 믿음행함을 대비하고,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말뿐인 것행함사이를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곧 본인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할 뿐전혀 행함이 없는 자를 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면서 야고보는 다시 전한다.

본문 15, 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 장로는 아주 현실적인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예로 들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이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그저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 더웁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 나는 믿음이 있어’,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말로만 떠들고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자칭 좋은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그 믿음을 입증하는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게 어떻게 믿음이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바로 말뿐인 것행함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말뿐인 것믿음이 아니라 빈말이며 그 자체로서 죽은 것일 뿐이다.

지금 야고보는 진짜 믿음은 있지만 부족하고 연약해서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약한 믿음을 가진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잘못된 믿음’,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아예 없는 믿음’, ‘말뿐인 믿음올바르고 참된 믿음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 믿음이 만일 참된 것이라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믿음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고, 아예 믿음이 없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그는 17절에서 이렇게 확증하고 있다.

본문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죽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동, 행함이라는 모습이 당연히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야고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믿음행함의 관계를 가르친다.

본문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본문에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주는 신자어떠한 행동과 생활도 보여 주지 않는 오만한 위선자간의 대화가 나타난다.

행함이 있는 자가 행함이 없는 헛된 믿음에 대해 반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현대어 성경으로 이 말씀을 읽어보겠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될 뿐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한 행동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한 행동이 없이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을 이원론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라고 하면 손바닥과 손등 둘 다를 포함해야 한다.

앞뒤가 다 손바닥이면 기형이지 일반적인 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구원의 믿음은 믿음행함이 하나이다.

바로 이것을 당연시하면서 야고보 장로는 책망하는 말투로 질문을 던진다.

본문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귀신들의 믿음을 말한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다고 해서 귀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고 있고, 그 존재를 믿는다고 해서 귀신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에 그칠 뿐, 참된 믿음일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는 부정하는 믿음에 대한 정면으로 비판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의 말씀에 대한 아무런 실천이 없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를 단지 인정하는 믿음과 유일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믿음의 행위로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이다.

본문 19절을 현대어 성경 버전으로 읽어보겠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인 인정과 의지적 결단, 그리고 행동적 순종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야고보는 귀신들의 예를 들어 그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생각과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전한다.

사탄도, 마귀도, 귀신들도 성경의 모든 계시가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귀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주님께 복종할 의사가 없다.

그렇기에 귀신을 향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즉 신앙의 외형적 명목만 가지고 있을 뿐 실상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사도 바울도 야고보 장로처럼 그레데인들의 지식적 믿음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혹시 우리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말뿐인, 존재만 인정하는 믿음은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부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귀신들도 하나님을 인정한다.

예수님을 인정한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로는 떠들면서 그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일 뿐이다.

 

믿음은 문법적으로 명사이다.

하지만 신앙에서의 믿음은 동사여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을 아는 대로, 주님께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실제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다.

 

야고보 장로는 본문 20절 말씀을 통해 이렇게 외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이냐?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님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야고보 장로는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구약의 인물들을 통해 설명한다.

먼저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본문 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심만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믿음을 발판 삼아 행동했으며,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

말씀을 믿은 대로 행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으로 자신의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행함을 보였다.

그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기생 라합을 행동하는 신앙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본문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은 아브라함처럼 신앙의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소문만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여인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을 이렇게 평가한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야고보도 라합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와 같은 평가를 내린다.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내보낸 것이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라합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다.

그 일에 생명을 걸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그래서 라합과 그의 식구들만이 여리고 성이 멸망하는 가운데에서도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후일,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가 되었다.

 

야고보 장로가 제시하는 믿음의 예는...

모든 성별, 계층, 직업, 성향, 어떤 사람이든지, 오직 믿음으로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움직이는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우리는 참된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여야 한다.

입이 아닌 삶의 현장으로 입증하여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

삶으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순종으로...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더불어 우리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전파될 수 있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사람이교회'는 온라인교회입니다.

'사람이교회'와 함께하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 메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saramichurch@naver.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