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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59 행동하는 믿음-야고보서(I)

말씀하신 이유는 실천하라는 것.(야고보서 1:19-27)

by TwoTalents 2023. 8. 20.

제목 : 말씀하신 이유는 실천하라는 것.

 

본문 : 야고보서 1:19~27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말씀 :

야고보서 다섯 번째 말씀이다.

 

의사 한 명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의사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것은 그가 일하는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로 만나는 것이다.

아니면 그 의사가 명함을 돌리면서 자신이 의사라는 것을 말하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삶에서 의사의 모습이 드러나면 그를 의사로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의료적 긴급 상황이 생겼는데, 마침 그 자리에 그 의사가 있어서 응급처치를 도와주었다면 사람들은 그가 의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긴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의사로서 사회 활동도하고 주변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의료적 강연 활동 등을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의사로 알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게 하는 것도 비슷할 것 같다.

사람들이 내가 다니는 교회에 오면 내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면서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것이다.

알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말할 수도 있고, 주보나 전도지 들고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도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내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드러나는 것으로 사람들이 내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세 가지 방법은 다 필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직접 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전한 그리스도의 진정성이 있으려면,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깐 내 삶의 모습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하신 이유는 실천하라는 것이다.

 

지난 말씀 본문의 마지막에서 야고보 장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낳으셨다고 고백하였다.

오늘은 그렇게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그 새로운 탄생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를 전하고 있다.

야고보 장로는 먼저 사람이 속히 해야 할 것과 더디 해야 할 것을 구분한다.

본문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속히 해야 할 것은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우리는 그다음 행할 바를 알게 된다.

그렇기에 말씀을 들음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본문의 속히는 헬라어로 타퀴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속히’, ‘재빠르게’, 라는 의미와 함께 준비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깐 말씀을 듣는 것에 언제라도 준비된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열린 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듣는 것에 속히 하라고 전한 야고보는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디게 할 것을 당부한다.

이 부분은 말씀을 속히 듣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나의 말은 뒤로 미루는 것이다.

흔히 믿는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하면서 자기 할 말만 실컷 떠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응답하실 시간을 줘야 할 것 아닌가?

기도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해서는 이 부분만 다음에 다시 한번 나누도록 하겠다.)

 

야고보 장로는 말하는 것과 함께 더디게 해야 할 것을 하나 더 말하고 있다.

그는 성내기를 더디하라고 말한다.

본문에서는 성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디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내기에 앞서서 한 번 더 생각하라는 말이다.

개인적이면서 정의롭지 못한 분노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의로운 분노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윗이나, 바울,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의로운 분노를 알고 있다.

이런 분노는 참을 수 없다.

하지만 개인의 자존심 때문에 드러나는 분노,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표출되는 분노는 허망한 분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야고보 장로는 분노에 앞서 그 분노의 본질을 분명히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를 위한 의분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화남인지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성내는 것을 더디게 하여 구분하라고 전하고 있는가?

본문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는 구분되지 못한 성냄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공의를 말하는 것이며, 공의는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의분이 아닌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분노는 결코 사랑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내 이웃을 마치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분에 못 이겨 화내는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자기만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해에 득달같이 분노하는 이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야고보는 성냄을 더디하고, 구분하면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가르친다.

본문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는 구분 없는 성냄을 더럽고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내어버리라고 말한다.

본문에서 내버리고는 헬라어로 아포티테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옷을 벗어 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깐 구분 없이 이기적인 분노를 쉽게 나타내는 옷을 벗어버리라는 말이다.

이는 삶의 양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고, 나쁜 습관을 버리리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전한다.

결국, 말씀이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기를 속히 하고, 성내는 것을 속히 하면서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고, 온유함으로 그 말씀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듣고, 온유함으로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 장로는 더 나아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본문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본문은 앞뒤 부분을 바꾸어서 읽으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런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그러니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라로 읽으면 이해가 쉬워진다.

말씀을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들음으로 말미암아 행동할 수 있는 이유,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듣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겠다는 신앙의 표현이다.

그런데 듣기만 하고, 이어지는 실천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나 자신은 물론, 하나님을 속이려고 드는 발칙한 거짓말이다.

교회 나오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듣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자에 대해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본문 23, 24.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하루 동안 나의 얼굴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거울을 통해 잠시 잠깐씩 얼굴을 볼 뿐,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더 많이 나의 얼굴을 본다.

나는 내 얼굴보다 남의 얼굴을 더 많이 본다.

그러니깐 내가 내 얼굴의 상태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모습을 제대로 알려면 거울을 보고, 또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들은 말씀이고, 내가 실천해야 하는 말씀인데, 그러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거울을 보았을 때, 내 얼굴에 무언가가 묻은 것을 보았다면, 거울을 보며 그것을 바로 닦아야 한다.

그리고 또 묻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깨달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부터 바로 실천에 들어가야 한다.

말씀을 듣고 또 듣고, 실천하고 또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 삶이 바뀌는 것이다.

지금 야고보는 깨달음 자체는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더 심화시키지 않으면, 곧 소멸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는 깨달음이 될 뿐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실천에 있음을 강조한다.

본문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완전하신 율법이다.

그런데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말씀에 주목해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듣고 주목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듣기만 하고 돌아서서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들어도 실천이 없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야고보는 오직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을 선언한다.

그렇기에 처음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본문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본문의 경건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누구라도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경건은 헛것, 즉 믿음이 헛것이라는 말이다.

야고보 장로는 앞서서 말하기를 더디하라라고 전하였다.

이것을 본문에서 자신의 혀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으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듣기를 더디하고 말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22절에 말한 것처럼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그런 경건은 나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를 구원하는 참된 경건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이렇게 전한다.

본문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는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타인을 향한 경건이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 되어져야 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경건이다.

나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여야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붙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나를 세속에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뜻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단순히 언급된 항목만을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경건, 흠 없는 경건,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경건이 하나님의 복으로 나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건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예배의 경건과 함께 일상의 경건이 실천되어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경건이 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 여러분...

말씀의 서두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러면서 세 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중 마지막 방법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것으로 사람들이 나를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르는 자로 알게 하는 것에 대해 나누었다.

일단 오늘날에 가장 필요한 방법은 바로 오늘 나눈 방법,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전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임을 증거하는 가장 건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임을 확신한다.

다른 방법이 필요 없거나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방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전한 복음이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고 있는가?

진정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있다고 신뢰를 주고 있는가?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는가?

 

<코로나 이후 종교 신뢰도 변화 도표>

이미지 출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것이 현실이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기도원 들어가서, 아니면 교회에서 철야 기도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처럼 종교적인 부분을 다 이해하고, 생각이 바뀌기를 기도해야 하는가?

그렇게 되지도 않고, 그것은 올바른 방법도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 베드로전서를 통해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행해야 할 바를 이렇게 전한다.

베드로전서 211, 12.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웃을 생각지 않는 선하지 못한 행동으로 무너진 신뢰는, 다시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으로, 그 사랑의 행함으로 다시 세울 수밖에 없다.

그 방법밖에 없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를 통해 무너진 교회의 신뢰, 하나님을 향한 영광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교회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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